신신과 이야기하는
동료의 형태

10호

들어가며

동료와 나는 어떤 관계일까요?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친구 같기도 하고, 어떨 땐 뜻을 함께하는 동지 같다가, 때로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전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료란 직장이나 팀에 소속되어 함께 일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가 오묘하게 섞여 있는 탓에, 동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괜스레 더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서로가 같은 방향으로 안전하고 온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관계를 꿈꾸며 『안팎』 10호에서는 부부이자 동료인 신신과 함께 ‘동료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신신

신신은 서울을 기반으로 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며 신해옥과 신동혁을 의미한다. 부부이자 동료인 두 사람은 함께 작업할 땐 신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독립적인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신해옥은 책의 구조 안에 텍스트, 이미지, 페이지의 가닥을 서로 엮고 꿰는 것에 관심이 있고 그것들에서 관찰된 관계에 집중하는 반면, 신동혁은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및 양식에 대한 이해를 현시대의 맥락 안에 재배치하는 작업에 주목한다. 신해옥과 신동혁은 단국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신해옥은 2018년 예일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신신은 2008년부터 큐레이터, 편집자, 예술가 및 기관과 협력하며 예술 및 문화 분야에서 함께 일해왔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큐레이터와 에디터, 작가 및 미술 기관과 협업하며 책과 도록, 전시 아이덴티티, 포스터 등 다양한 매체의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하이퍼링크

반갑습니다. 『안팎』의 고정 질문이자, 저희가 가장 고대하는 질문이기도 해요. 오늘의 대화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딱 한 곡만 골라본다면 어떤 곡일까요?

글쎄요. 왠진 모르지만 갑자기 이기팝(Iggy Pop)의 『러스트 포 라이프(Lust for Life)』라는 곡이 생각나네요. 단순히 음악만 떠올랐다기보다는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도입부에서 배우 이완 맥그리거(Ewan McGregor)가 연기한 주인공 마크 렌턴(Mark Renton)의 내레이션과 어우러지며 배경음악으로 등장했던 그 곡이요. 대충 이런 대사였던 걸로 기억나네요. “Choose life. Choose a Job. Choose a Career. Choose a Family. Choose a F*cking Big Television. … ”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화에 사용될 두 가지 컬러도 골라볼 수 있을까요?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빨간색과 파란색이 떠오릅니다. 갑자기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빨간색, 파란색 알약이 떠올랐어요.

2014년 그래픽 스튜디오 신신을 설립하여 올해로 10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소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혹시 따로 10주년을 기념하셨거나, 하실 예정인지도 (어쩐지) 궁금하네요.

신동혁(이하 ‘동혁’): 2014년에 결혼하면서부터 신신을 같이 시작했어요. 10년 동안 서로 잘 배려해 왔다는 차원에서 결혼을 기념하자고 몇 달 전부터 이야기는 했는데, 스튜디오로서의 기념은 생각을 못 해본 것 같네요. 2008년, 저희 둘 다 학부생일 때부터 느슨하게 함께 협업해 오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스튜디오의 개념보다는 함께 활동하는 공동체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신해옥(이하 ‘해옥’): 동혁 씨 말대로 저희가 어떤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그때부터 사업을 키워왔다고 하면 10년의 의미가 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저희는 스튜디오로서 무언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는 편이에요. 다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같이 일해온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신이 10년이라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동료들에게요.

그렇다면 결혼에 대한 소회는 어떨까요? 10년이라는 시간이 새삼 놀라워요.

해옥: 그러니까요. 정말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어요. 저희도 내년이면 결혼 10주년이라고 장난도 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새삼 ‘10’이라는 숫자가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 같아요.

동혁: 막상 결혼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살면서 점점 의미가 커지는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연애에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지나갔거든요. 둘 다 결혼에 대한 청사진도 없었고, 이렇다 할 목표나 다짐도 없이 상황이 닥치는 대로 지내오다 보니까 결혼에 이르렀는데 이제는 점점 그 의미가 커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더 잘 살자는 이야기도 하고 새삼스럽지만 서로에 대한 인사도 하고요. 해옥 씨와는 일도, 사랑도, 경험도 공유하는 데다가 거의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까 좀 남다른 결혼 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신의 결혼식

사실 이번 대화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어요. 두 분은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이면서도 그 경계가 굉장히 흐릿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요즘은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려고 다들 무진 애를 쓰잖아요.

동혁: 저는 그게 구분이 되나 싶긴 해요. 구분을 할 수 있다면 어느 한쪽은 거짓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시대를 막론하고, 위대한 창작자들은 일과 삶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일과 삶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게 더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살면서 소비하거나, 눈에 담아놨거나, 기억하는 것들이 작업할 때 툭툭 나와야 더 자연스럽다고 느끼거든요. 삶에서의 입력값이 있다면, 일에서의 출력값은 제 식대로 소화해서 내놓는 방식인 거죠.

해옥: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일과 삶 중 어떤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저희 성향인 것 같아요. 저희는 출퇴근 시간이라 할 것도 없고, 좋은 생각이 번뜩일 때 일했다가, 그렇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놀기도 해요. 애초에 경계를 별로 나누지 않는 편이에요. 저희가 일하면서 생긴 습관이자 버릇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 같아요. 그래서 스튜디오의 규모를 키우거나 본격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에 대해 좀 부담스럽게 느끼는 면도 있어요.

신신의 작업 공간

그러게요. 충분히 규모를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동혁: 규모가 커지면 오히려 지금처럼 기동성 있게 움직이기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바로바로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고정비용이 큰 형태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려면 예산 계획부터 해야 하잖아요. 아무래도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확률이나 특성이 떨어지겠죠.

신신의 웹사이트

그렇다면 스튜디오를 처음 시작했던 때와 지금, 달라진 것과 동일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해옥: 달라진 거라고 한다면 예전에는 뭐랄까, 소꿉놀이하는 기분도 좀 있었거든요. 작업적인 면에서도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하는 확신도 없었고, 그냥 ‘재밌으니까 해보자.’ 하는 마음이 컸어요. 지금은 일에 대한 확신도 좀 더 생겼고, 같이 일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더 많이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에요. 굳이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어떤 것을 도모해 볼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된 것 같아요.

동혁: 예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건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작업 분야에요. 달라진 것은 글쎄요, 이런 생각은 들어요. 오히려 예전에는 처음 일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던 것 같거든요. 첫인상이나 프로젝트가 다른 일과도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오래된 관계들이 주는 일이 더 무겁게 느껴져요.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도 좀 생긴 것 같고,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된 동료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죠. 얼마 전 『안팎』에 등장했던 길종 씨 같은 경우도 저희에게 거의 무한 신뢰를 보내주실 때가 있거든요. 그 기대치에 부응하는 게 제일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박길종 개인전 『여름 그늘, 휴거』 포스터, 2023

길종 님과 대화 나눌 때도 느꼈지만, 정말 신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게 뼛속까지 느껴졌어요.

동혁: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저희가 길종 씨에게 일을 의뢰드릴 때마다 늘 많은 비용을 드리지 못했거든요. 그렇지만 길종 씨가 그 당시에 제일 관심 있어 하거나 해보고 싶은 것, 남은 재료 등이 있다면 마음껏 써볼 수 있도록 믿고 맡겼어요. 저희가 판을 깔아드리면 길종 씨가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저희는 너무 즐거웠거든요. 저희를 위한 최고의 공연 같은 느낌이었죠.

화원의 세 번째 책이자 『gathering-flowers』 총서의 첫 번째 선집 『개별꽃』, 두 번째 선집 『사포도』, 그리고 『길종상가 2021』

길종 님도 마찬가지로 즐거웠을 것 같은데요?

동혁: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일을 하면서 피로감을 느낄 때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부분의 영역을 좁게 설정해 두고 저희한테 맞추라고 할 때거든요. 연인 관계에서 ‘화가 났는데, 왜 화났는지 알아맞혀 봐.’ 하는 것처럼요. 차라리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길종 씨랑 일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냥 뭐가 나오나 보자.’라는 태도가 있어요. 그게 되게 재밌죠.

동료 간에 뭐든지 말해보고 시도해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바탕에 깔리면, 일도 재밌어지고 작업 영역도 확장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시너지가 나는 거죠.

해옥: 맞아요. 특히나 최근에는 저희가 활동할 수 있는 분야가 많이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전시에 작가로 참여하거나, 최근에 큐레이터로 참여한 것도 그렇고요. 예전에는 ‘디자이너’라는 역할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하면 지금은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졌죠. 돌이켜 보면 10년을 잘 버텨왔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베를린에 위치한 김영삼, 신덕호, 파벨 볼로비치의 작업실 뒤뜰에서, 2022

정말이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동료가 만들어 온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죠? 정말 만약에요.

동혁: 글쎄요.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었어요. 저희는 뭔가를 부탁할 때 오래 고민하고, 한 번 맡기면 별 얘기를 안 하는 편이에요. 왜 옛날에 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에 놀러 오실 때마다 사랑방 캔디가 든 선물 상자 같은 거 사다 주시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기대도 안 한 깜짝 선물 받고 놀라듯이 ‘이런 게 오네!’ 하는 일이 즐겁고 신나죠.

의뢰를 받은 동료 작업자 입장에서도 훨씬 주체적으로 임할 수 있겠네요.

동혁: 디자이너는 늘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자신을 소개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요. 그런데 저는 반대로 디자이너를 고르는 사람도 좀 더 그 디자이너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치 물건을 살 때 이것저것 열심히 따져보듯이요. 단지 ‘요즘 누구누구가 유명하던데.’라는 게으른 조사로만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디자이너가 평소에 어떤 작업을 했는지 더 알아보고 계속 협업하다 보면 의뢰인만의 색깔이 디자이너의 손을 통해서 시각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더 명확해지는 측면이 있거든요. 그걸 가끔 깨줘야 할 경우라면 그때는 다른 디자이너와 협업해 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좀 드물다는 게 아쉬워요.

클라이언트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결하세요?

해옥: 예전에는 ‘저희가 할 일이 아닌 것 같다.’라고 거절도 많이 했는데요. 그간 일을 하면서 많이 훈련되기도 했고, 요즘의 저희는 일을 잘 끝내고 마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저희가 지키고 싶은 부분은 지키는 거죠. 저희끼리 그냥 늘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이 프로젝트에서 이런 걸 해봐서 좋았다.’라는 걸 적어도 하나씩은 꼭 해보자고 이야기해요. 그런 면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나머지는 내줄 수 있다는’ 타협 능력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20대 초반의 신신은 각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유년 시절의 꿈도 디자이너였을까요? 모든 게 불확실하던 시절에는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지 궁금해요.

해옥: 저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부터 디자이너가 막연한 꿈이었어요. 그림 그리면서 입시도 준비하고, 디자인과를 가는 게 저한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런데 시각 디자인도 분야가 너무 다양하잖아요.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게끔 만들어준 계기는… 학교를 들어갔는데 제가 보기에 멋있는 작업을 하는 선배들이 전부 이쪽 분야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또, 서울에 있던 학교가 경기도 용인으로 이전하면서 수업보다는 친구들끼리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여러 활동에 더 몰두해 있었던 것 같고요. ‘학교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구나. 우리가 하고 싶은 건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죠. 그때부터 동혁 씨랑 동아리도 조직하고,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일들의 해상도를 점점 높이는 작업들을 해왔어요.

신신이 학교에서 운영했던 동아리 tw(typography workshop)

동혁: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딱히 잘하는 게 없었어요. 학창 시절에도 미술 시간에만 자존감이 생기는 그런 사람이었죠. 서울에 있는 미술 대학을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학교의 이전으로 인해 학교가 내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어요. 저는 반골 기질이 좀 있거든요. 그런데 마침 학교가 경기도로 이사 가면서 비는 강의실들이 많아져서 그중 한 곳을 동아리실로 사용했어요. 학교생활보다는 디자인 공부와 동아리 활동에 집착했죠. 붙잡고 있을 게 그것뿐이기도 했고, 디자인이 재밌기도 했고요. 다른 학교에 가서 전시도 보고, 또래 친구들의 작업을 보고 질투도 하고, ‘나도 더 잘해야지.’ 하면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더 열심히 해보려고 애썼어요.

tw(typography workshop) 웹사이트

탐구하는 태도가 대단한데요. 한편으로 굉장히 즐거워 보이기도 해요.

해옥: 우당탕탕, 얼렁뚱땅, 좌충우돌, 엉망진창 했죠. 그런데 그때를 돌이켜 보면 보면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그래픽 디자인 역사책을 여러 구성원이 부분적으로 공부한 다음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다른 친구들에게 알려주기도 했고요.

동혁: 맞아요. 20대 내내 책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그냥 작업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비평하고 그랬죠. 일주일에 전공 서적을 두세 권씩 읽고, 또 사진, 미술, 건축, 패션 등 인접 분야의 서적들까지 계속 읽었어요. 그때는 막상 머릿속에 콕콕 박히지 않았거든요? 하나도 안 들어와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람 이름이나 고유명사도 너무 많이 나오고. 그래도 그냥 읽는 거예요. 그런데 따로 존재하던 퍼즐 조각 같은 정보값들이 나중에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때가 오더라고요. 20대 때는 그렇게 지루하게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해요. 그래서 보는 것도, 읽는 것도 중요하고 여러 작업물을 손으로 직접 만지작거려 보는 것도 중요하죠. 게다가 그런 시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랑 연결되는 경험도 많이 했어요. 어떤 동료의식이나 연대감 같은 걸 느끼죠. 해옥 씨와의 연애도 공부의 연장선처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둘이서 계속 디자인 이야기만 했거든요. 누구 작업 잘하는 것 같더라, 짜증난다 하면서.(웃음)

『Gathering flowers』 포스터
『Gathering flowers』 전시 전경 (취미가, 서울, 2021)

누가 먼저 연애하자고 하셨어요?

동혁: 제가요. 서로 친해지고 한 3일 뒤인가?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사는 동네도 비슷해서 버스도 같이 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얘기도 많이 하게 되고, 그랬죠.

해옥 님이 쑥스러워하시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혹시 지금도 공부하고 계시나요?

동혁: 관심 가는 책들은 완독은 못 하더라도 그때그때 짬짬이 읽는 편이에요. 특히 저도 인터넷을 안 하는 건 아니니까 짧은 콘텐츠나 영상물에 익숙해지다 보니, 장문의 텍스트를 읽는 게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더라고요. 활자를 읽는 습관은 계속 연습해 두지 않으면 쇠퇴하는 것 같아요.

해옥: 저도 그래요. 공부에 대한 갈증도 있어서 5년 전쯤에 대학원을 갔다 오기도 했고요. 저는 제가 학교에서 수업할 때도 학생들뿐 아니라 제 스스로의 공부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과제를 주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제가 몇십 배는 더 알아야 하니까요. 제가 읽고 싶은 책을 다 같이 읽는 것도 자주 해요. 매주 리딩 자료를 주고,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이 많은데 그렇게 해서라도 너무 작업만 하지 않고 주변에 새롭게 만들어진 텍스트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신신에게 디자인 공부는 ‘끊임없이 재밌는 행위’인 것처럼 보여요.

동혁: 맞아요. 어렸을 때 억지로 안 했더니, 오히려 커서 되게 재밌더라고요. 무엇보다 디자인은 제가 알고 싶은 분야라서 더 재밌는 것 같아요.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어 있고, 납득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제는 뭔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느끼는 거죠. 공부를 통해서 새롭게 연결되는 경험들에는 엄청난 쾌락이 있어요.

해옥: 사실 학교라는 곳이 여러 가지 공부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좀 더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근래에는 모든 게 취업에 맞춰져 있죠. 특히나 디자인과는 더욱 그래요. 매체도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툴만 해도 3D부터 코딩까지 쫓아가기에도 버거운 상황인 것 같아요. 그래서 기술에 끌려가기보다 수업할 때 텍스트를 함께 읽고 그 안에서 유의미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거죠. 저는 대학원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누렸던 혜택이 많거든요.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하지만, 아쉽게도 항상 참여율은 저조해요.

『NEWSPAPER』 NO.3

자신의 생각을 나누기보다, 다른 이들의 대화를 ‘관람’하는 게 익숙한 시대죠.

동혁: 가끔 학생들은 ‘대학교 때 꼭 해야 하는 게 무엇일까요?’ 이렇게 질문해요. 그러고는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죠. 그런데 사실 그거는 사회에 나가서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거든요. 하지만 회사에 가면 공부를 하거나 서로의 생각을 가감 없이 나눠보는 경험은 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또 제일 많이 물어보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AI 시대에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은 건데, 저는 꼭 책 많이 읽으시라고 이야기해요. 오늘날에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매체 편향적인 경험인 것 같아요. 기술적으로, 인간 속도로는 인공지능을 못 따라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혀 엉뚱한 자료나 사건들을 이어서 새로운 콘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조금 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관점이 없으면 앞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겠죠. 다양한 매체 경험을 통해 각 매체의 장단점을 파악한 뒤에 균형감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어떤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고 제시할 것인가, 그 디렉션을 고민해야죠.

하지만 그런 관점은 당장 습득되지 않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죠. 그래서 더 눈에 보이고 기록으로도 남는 기술을 익히려고 하는 것 같아요. 마음은 늘 한발 더 조급하니까요.

동혁: 그렇죠. 단기 효용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내공을 쌓고 지식을 축적하는 일은 한 10년 뒤에나 갑자기 그 점들이 이어지면서 깨쳐지거든요. 단기 성장이 있고 장기 성장이 있는데 실시간으로 자기가 성장하는 걸 확인하고 싶다면 그룹 전시를 하거나 공모전에 나가서 객관적인 모니터링을 해볼 수 있어요. 이미 많이들 하고 있는 하나의 방법이죠. 그런데 지식을 축적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투자를 잘 안 해요. 하지만 전 길게 봤을 때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두 분이 교수님으로서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줄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동혁: 저는 주로 작업 전반의 짜임새를 보는 것 같아요. 이 작업이 얼마만큼 논리적으로 잘 짜여 있는지, 이 사람이 말한 것과 최종 결과물이 일치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들을 했을 텐데 그 선택들은 타당한지. 개인의 취향이나 호불호를 떠나서 제가 준 단서를 어떻게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결과물에 적용을 했는가를 보는 거죠. 관습을 한 번 비틀었을 수도 있고 혹은 규칙을 잘 지켜서 완성도 있게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탁월한 작업들이 나오기도 해요. 저는 과제를 내줬을 뿐인데 어설프더라도 제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걸 가져와서 거기에서부터 유의미한 대화가 시작된다면, 그 자체로 너무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디자인은 취향의 문제일까요?

동혁: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지만, 그건 비교적 적은 부분인 것 같아요. 저는 ‘취향’이 근래에 많이 오염된 단어 중 하나라고 느껴요. 취향은 살면서 내린 수 많은 선택의 축적이지, 하나의 소비를 위한 프레임처럼 사용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취향이란 단어가 마치 남보다 우월한 위계나 지위를 설정하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도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어떤 대상에서든 자신에게 중요한 요소를 선별해 낼 줄 아는 안목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그럼, 안목은 타고나는 걸까요?

동혁: 안목은 길러지는 것 같아요. 안목이라는 건 해당 대상이 속한 분야의 역사적 배경이나 중요한 정보 등을 지도처럼 기준으로 삼고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라서,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길러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참조점들을 주변에 둘러놓고 대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까요.

해옥: 취향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준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핀터레스트도 그렇고, 유튜브도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 모두가 초연결되어 있다 보니 점점 취향이 평준화되고 닮아가는 면이 있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고유함을 만들고 지켜내려면 정말 노력해야 해요. 매순간 자연스럽지만 신중한 선택들을 연속하다 보면 자신만의 고유한 결이 만들어지는데, 그게 시각적으로, 분위기로 전달되는 게 중요한 거죠. 단순히 소비적인 단어로만 사용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디지털 매체를 접하기가 너무 쉬워졌기 때문에 삶의 질은 되려 떨어지기도 했어요. 이젠 하나의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것도 어렵죠. 생각할 거리도 없고요.

동혁: 얼마 전에 저희가 영화 GV에 초청받아서 다녀왔는데, 아주 생경한 경험을 했어요. 『책 종이 가위』라는 일본의 북 디자이너 키쿠치 노부요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을 봤는데, 그냥 할아버지가 나와서 종이를 만지고 자르는 거예요. 사실 별 장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어떤 화려한 CG가 들어간 영화보다 더 집중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뭐랄까, 익숙한 행위인데도 거대한 스크린에서 목도하니까 눈을 떼기 어려웠어요. 사실 컴퓨터에 의지하는 작업은 정확하고 실수도 줄지만, 직관력은 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수작업은 한 번 망치면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하니까 직관력과 집중력을 극도로 올리는 작업 방식이죠. 그게 엄청 아름다웠어요.

동혁 님 인스타그램에는 어느 할아버지가 말없이 다림질만 하는 영상도 있죠. 근래의 관심사인가 했어요.

동혁: 네, 저는 요즘 새로운 것보다 어떤 걸 진득하게 해오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관찰하는 게 더 재밌어요. 말씀하신 건 제가 정말 좋아했던 영상이에요. 일본의 어떤 세탁소 사장님이 말도 없이 다림질만 하는 영상이죠. 정말 아름다워요. 다림질을 하도 많이 하셔서 테니스 선수처럼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머리도 포마드로 싹 넘기셨는데 그 체형과 단정함이 모두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뭔가 저도 그분에게 맡기고 싶어지잖아요. 내 옷도 저렇게 깨끗하게, 정연하게 다듬어지겠구나.

신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실천에 옮기며 적응하고 해결하는 편일까요? 혹은 사전에 꼼꼼하게 계획하고 연구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일까요? 두 분의 작업 과정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해요.

신신: 경우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치밀한 계획을 만나 구현되기도 하고, 반대인 경우도 많고요. 질문을 받고 돌이켜 보니 저희가 어떤 일관성을 추구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다소 즉흥적이고, 산만하고, 진지하다가도 너무 무거워지는 건 싫고···. 다중적인 면이 있는데, 그럼에도 저희 스스로 프로젝트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만족적인 세부들을 챙기는 건 그나마 일관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던 내용이긴 한데 신동혁은 좀 더 작은 단서들을 쌓아 올리면서 작업하는 편이라면, 신해옥은 큰 그림에 세부를 다듬어나가는 식으로 작업하는 것 같아요. 그런 성향 덕분인지 타이포그래피나 글자체에 관한 부분은 신동혁이 많이 챙기고, 이미지나 시퀀스 등은 신해옥이 좀 더 챙기는 편이라고 봅니다. 프로젝트마다 서로의 특장점을 활용하거나 섞는 경우도 더러 있고요.

작업을 마치고 나면 그에 관한 과정, 감정, 소회 등을 기록해 두는 편이신가요? 있다면 신신의 기록 방법은 무엇일까요?

신신: 저희는 대화가 엄청 많은 편인데 상대방에게 감정이나 감상, 소회 등을 끊임없이 백업해 두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결과가 책이나 인쇄물 등의 물리적인 매체로도 많이 남겨지기 때문에 그걸 볼 때마다 생각나기도 하고요. 간헐적으로 웹사이트를 업데이트한다든가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도 사용해요. 특별할 건 없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서 자기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동혁: 사십대를 목전에 두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활동 초기에는 의욕 과잉에 경험도 적었기에 그냥 무조건 저지르고 수습하는 식이었어요. 확신이 없으니, 갖가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를 덕지덕지 붙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저희가 그려온 궤적을 단서로 삼으니 좀 덜 헤매게 된 것 같기도 해요.

해옥: 그런데 덜 헤맨다는 것이지, 엄청난 자기 확신이 있다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헤매고, 고민도 많아요. 왜냐하면 매번 다른 과제, 다른 협업자와 다른 조건에서 작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만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느슨한 기준은 있네요. 우리에게 흥미로운 아이디어인지는 정말, 엄청,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혹시 두 분은 안 싸우시나요?

동혁: 점점 안 싸우고 있어요. 뭐 늘 투닥투닥은 하죠. 이거 하냐 마냐 뭐 이런 얘기는 하는데 갈등상황까지 간 적은 요즘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일의 측면에서 날선 피드백을 주고받기도 할까요?

해옥: 이제는 각자 자기 작업이 후진지 아닌지 다 알아요. 옛날에는 둘이 서로 가장 솔직해야 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걸 바로바로 말했다면, 이제는 굳이 터치 안 해요. 자기 작업에 대한 객관화가 되어 있어서, 상대에게 뭔가를 물어봤을 땐 확신이 없어서 물어보는 거라는 걸 각자 스스로 아는 거죠.

동혁: 해옥 씨가 과일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빌리자면 저희는 서로가 물러지지 않게 계속 굴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자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수도 있거든요. 오히려 나의 어떤 잠재력이 친구의 눈을 통해서 다르게 발현될 수도 있어요. 저랑 해옥 씨도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랑 단점 같은 것들을 상대가 먼저 알아봐 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결국엔 같이 잘 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 밑바탕에 깔린 마음도 알고. 굳이 싸워서 뭐 하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20대 때는 정말 엄청 싸웠죠.(웃음) 그래도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좋은 점이라고 하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는 정말 막힘이 없다는 점이에요. 과거에 이런 요령 없이 안 좋게 풀릴 때는 모든 게 브레이크였죠. 설거지 하다가 싸웠는데 갑자기 ‘그때 그 포스터 폰트 크기 마음에 안 들었어’하고 싸우는 식이죠.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디자이너는 영문 서체를 선호한다는 볼멘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에 대한 생각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동혁: 신기하네요. 아직도 이런 소리가 나오는군요! 뭐 소통만 된다면야 저희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에요. 그런데 디자이너들은 좀 억울할 수도 있어요. 이런 현상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디자이너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가 뭔가 대단한 권력을 쥐고 모든 세부사항을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의뢰인의 결정이나, 유행, 사회 분위기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호 좀 하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저희가 우려하는 건 언어의 문제라기보다는 세부의 문제에요.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로만 타이포그래피 또는 한자 타이포그래피의 완성도가 비슷한 수준인지 아닌지가 중요해요.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훌륭하게 조율되었는데, 로만 타이포그래피가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반대인 경우에는 품질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역량이 의심받을 수 있죠.

지난 9월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에서 해옥 님은 큐레이터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어요. 어떤 전시였는지 잠시 소개해 주시겠어요?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전시 포스터 ⓒ프론트도어

해옥: 네, 보통 타이포잔치는 문자와 결합해서 어떤 한 가지 또 다른 주제를 탐구하는 작업들이 전시 되는데요, 이번에는 ‘문자와 소리’라는 주제가 주어졌어요. 사실 문자는 너무나 당연하게 시각적인 것이고 소리는 청각적이잖아요. 그래서 이 두 가지 감각을 왔다 갔다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변형되는 것들, 아니면 생각지도 못했던 무언가가 발견되는 과정들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했어요. 총 39팀의 작업이 전시되었고 저도 여러 번 관람했는데 감상할 때마다 새롭게 느끼고 공부할 만한 것들이 많은 전시였던 것 같아요.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에 전시된 신양장 표음 전경(문화역서울284, 서울, 2023) ⓒ글림워커스, 사진 제공: 타이포잔치2023

이번 전시에 신동혁, 장수영, 양희재가 만든 『신양장표음』이 출품되기도 했어요. 미디어버스의 임프린트 화원(花園)의 다섯 번째 출판물이기도 하죠. 보자마자 율동 같은 글자체라고 생각했어요.

동혁: 네, 말씀 하신 게 정확해요. ‘우리가 말하는 언어는 청각적인 거니까, 소리를 시각 기호로 체계화한 게 한글이란 문자라면 다른 음의 속성도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발음이 글자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그 글자의 어느 위치에 점이 찍히느냐에 따라서 음계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 아이디어를 세종문화회관 CI 작업할 때 테스트 삼아서 프로토타입처럼 만들어 봤었어요.

세종문화회관 CI에서 획대비 등을 변경하고 가다듬는 방식으로 만든 게 이번 타이포 잔치에 선보였던 신양장표음입니다. 양희재, 장수영, 저까지 셋이서 공동으로 활자체 작업을 하고 문정주 님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타이핑과 동시에 건반 소리도 나는 인터렉션 작업으로까지 이어졌죠.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을 상대로 『신신 서바이벌 가이드』를 공유하기도 했죠. 그리하여,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생존해갈 수 있을까요? 가이드를 살짝 들어볼 수 있을까요?

해옥: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큰 야망 없이 저희가 좋아하는 걸 디자인을 매개로 향유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희가 좋아하는 걸 단순히 소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게 제 안에서 다시 창작의 도구나 재료, 또는 원동력이 되어 무언가로 재생산될 수 있는 순환고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세로부터 다소 멀어지는 것, 눈치보지 않고, 염탐하지 않고, 내 갈길 가되, 타인에게 친절할 것. 정도면 꼭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세상이 조금은 더 다채롭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신신 서바이벌 가이드

한편 이전에 동혁 님이 디자이너는 자신의 활동을 증명받을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FEUILLES』로 받은 국제 책 디자인 공모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골든 레터 수상이 조금은 답변이 되었을 것 같아요.

동혁: 네, 간혹 프로젝트를 마친 후에 동료들의 칭찬이나 내부자들끼리 주고 받는 덕담 이상의 보상을 바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골든 레터 수상은 저희의 작업 논리가 언어와 국적을 넘어서도 공감 받을 수 있다는 걸 경험한 감사한 순간이었어요.

수상 이후 주변에서 받았던 재밌는 피드백이나 일화가 있었을까요?

해옥: 수상에 대해 실감하게 된 일화는 있었어요. 미디어버스의 제안으로 독일의 스펙터 북스 출판사에서 펴낸 요나스 메카스 『영화작가들과의 대화』를 디자인하게 되었을 때였는데요. 디자인 컨펌을 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스펙터 북스에서 저희가 디자인하는 걸 알고는 그 과정을 생략했어요. 독일에서 주최한 공모전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모쪼록 수상의 영향을 실감하게 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디자인, 전시, 예술 분야를 제외하고 가장 최근의 관심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흥미롭게 생각한 인물이나 가게도 좋아요.

동혁: 저는 시간을 견딘 사람이나 물건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오래된 티셔츠나 핀버튼, LP, 그리고 이불처럼 시간을 견뎌낸 것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면, 저희가 지금 여기에서 만든 것들도 그렇게 다음 세대와 연결되기를 기대하게 돼죠. 얼마 전에 EBS 교양 프로그램 『건축탐구 집』에서 다뤘던 전영애 교수님 편도 인상 깊었습니다. 책이 만든 특별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자, 마지막 질문이에요. 만약 한 달간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계획을 세우시겠어요?

신신: 아무 계획도 세우고 싶지 않은 걸요.

“저희는 서로가 물러지지 않게 계속 굴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자신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수도 있거든요. 오히려 나의 어떤 잠재력이 친구의 눈을 통해서 다르게 발현될 수도 있어요.”

『안팎』 10호
신신과 이야기하는 동료의 형태
https://anpakk.kr/conversations/10

  • 안: 김하영, 박푸름, 이주화
  • 팎: 신신
  • 글자색: Red
  • 배경색: LightSkyBlue
  • 발행일: 2023년 12월 20일
  • 최종 수정일: 2023년 12월 19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