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걸과 이야기하는
질문과 대답 사이

11호

들어가며

사실 처음에 이야기 나누고자 한 건 ‘문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문장은 대체 무엇이 다른지,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그러나 대화를 나누던 중 마음을 바꿨습니다. 글쓰기는 우주에서 오로지 나만 겪은 것을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자, 동시에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할까요? 질문은 꼭 필요한 행위일까요? 우리가 종종 질문하기를 주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무수한 의문 가운데 분명한 한 가지는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할 수도, 찾을 수도 없다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안팎』 11호에서는 문장의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에 작고 완전한 세계를 구축해 온 이충걸과 함께 ‘질문과 대답 사이’를 채우는 고유한 언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충걸

이충걸은 한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작은 학교 『스누트스쿨』의 교장이자 작가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만물에 호기심 어린 눈을 밝히는 소년이며, 때때로 세상의 이면을 목도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충걸은 글쓰기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능이며,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저서로는 『슬픔의 냄새』,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이 있으며, 대상의 감정과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기록한 인터뷰집 『해를 등지고 놀다』와 『질문은 조금만』을 펴냈다. 약 18년간 『GQ KOREA』의 편집장을 맡아 한 시대의 문체를 만들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안팎의 고정 질문이자, 제가 가장 고대하는 질문이에요. 오늘 대화에 어울릴 음악을 딱 한 곡만 고른다면?

이미자의 「타인」. 마지막 가사 때문에요.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당신과 나였나.

강렬하네요.

그 가사에 문학을 아우르는 힘, 파괴력이 있죠.

솔직히 이번 인터뷰는 좀 떨렸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말인데, 이런 저를 위한 위로의 한마디로 대화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저는 위로라는 것은 너무 취약하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위로해 줄 만큼 마음의 밭이 넓은 위인은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나이가 들었다고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거나 성숙해지는 건 아니에요. 위로하는 사람들도 다 뒷마당에는 고아가 울고 있어요. 저는 누굴 위로할 만한 스승이나 어른은 영원히 못 할 것 같아요. 단지 우리가 함께 있는 순간에 존중감을 갖고 서로를 대하면 그게 그 순간에 대한 매너이자 위로가 아닐까. 사실 ‘위로’라는 단어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흔해진 말이라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떨리는 한편, 굉장히 멋들어진 수락이었어요. 이렇게 말씀하셨죠. “메일 회신이 늦었던 죄로 인터뷰를 수락할게요.” 사실 회신이 빨랐어도 응해주실 예정이었을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가끔 인터뷰를 하긴 하지만 사실 좀 쑥스러워요.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있고. 저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뻔하잖아요. 만약 제가 한식 주방장이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요? 신선한 재료 고르고, 인생, 그리스도⋯ 그런 건가? 모르겠어요. 아무튼 부끄럽죠. 참, 『브람스라 부르자』 연극 보셨어요?

『브람스라 부르자』 포스터

네, 봤어요. 선생님이 극본 쓰시고, 박정자 선생님이 연기하셨죠.

어떠셨어요?

음⋯ 무슨 느낌이었냐면 죽기 직전에, 제가 상상하던 천국에서 박정자의 얼굴을 한 이충걸과 마지막 산책을 한 기분이랄까요? 굉장히 여운이 길었어요. 선생님은 어떠셨는데요?

저는 대본을 쓴 사람이니까 몰입할 수가 없어요. ‘혹시 실수가 생기진 않을까? 사운드가 왜 이렇게 작지?’하는 생각에 너무 불안하죠. 저는 공연을 두 번 봤는데, 첫 번째 봤을 때는 선생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으셨어요. 대사도 그렇고 목 상태도 안 좋으셔서 굉장히 걱정했어요. 다행히 두 번째 날은 컨디션이 딱 좋으셨대요. 대사를 시작하자마자 안심이 됐죠. 그렇지만 제가 썼으니까, 몰입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선생님은 자신이 쓴 글에도 몰입이 잘 안되나요?

그냥 잘 썼다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게 무슨 몰입이 되겠어요? 쓰다 보면 또 고칠 게 있고, 또 틀린 게 있고. 그러다 보면 빨리 이걸 벗어나고 싶어요. 제가 1월 아니면 2월 중에 장편소설이 나오는데 그것도 퇴고를 너무 많이 해서 이젠 꼴도 보기 싫어요.

『해를 등지고 놀다』 같은 인터뷰집이나 『GQ』 같은 잡지도요?

전 지나간 건 잘 안 봐요. 집에 제가 다니던 『VOGUE』나 『GQ』도 한 권도 없어요. 인터뷰 책은 가끔 친구들이 초판본을 구해주기도 하고, 누가 찾아오면 제가 주기도 하고 그래요.

왜 안 보세요? 쑥스러워서요?

쑥스러워서라기보다 그냥 보기 싫어요. 너무 많이 들여다봤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어떤 찌개를 끓였는데, 계속 끓여서 염분만 남은 상태랑 똑같은 거죠.

그럼 예외적으로 한 번 본 걸 다시 본 경우도 있을까요?

『엑소시스트』요. 일곱 번 넘게 봤어요. 사운드도 그렇고 굉장히 잘 만든 영화죠. 완전히 전류가 흐르는 원초적인 공포가 있어요. 요즘처럼 CG가 발달해서 확 놀래키는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책을 두 번씩 보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저는 여러 번 보는 건 잘 못 하겠어요.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또 봐야 할 책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서 어떨 땐 콜로세움만 보고 로마를 다 봤다고 생각한다는 기분도 들어요. 관광지 말고 티베리스 강이라든가 뒷골목 바닥에 나는 작은 풀이라든가 볼 게 많을 텐데 말이에요. 책도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야 하는데, 이럴 땐 제 시력이 안 좋은 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죠.

『The Exorcist』(1973)

이충걸이 만든 한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작은 학교, 스누트스쿨의 글쓰기 클래스가 10회를 맞이했어요. 감회가 어떠세요?

제가 태어나서 한 것 중에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회계에 밝은 것도 아니고, 아까도 절세 관련해서 뭐 하라고 연락이 왔는데 그게 한국말인지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잘할 수 있는 걸로 작은 공간을 마련했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신의 너무나도 엄청나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보면 굉장히 기뻐요. 생각보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기쁨이 크고, 아이들이 제가 만든 이 작은 시멘트 교정에서 뛰어노는 걸 보면 흐뭇해요. 우리가 가라오케에서 폭탄주 좀 말다가 만난 게 아니고 스누트스쿨에서 만났다는 게 무엇보다 좋아요. 삶은 너무나 세속적이지만, 어떤 점에선 거룩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순간에 대한 자긍심이 있죠.

평생 하고 싶으세요?

평생요? 네, 그래요. 학생들이 찾아온다면요. 스누트에는 1년 6개월째 다니는 학생도 있고, 그만뒀다가 재등록한 친구들도 있어요. 너무 놀랍죠. 이제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 ‘나가서 혼자 써봐야지.’ 했는데 혼자는 안되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사슬이 필요하죠. 그리고 마지막 코너에 몰리고 마감에 쫓기는 순간, 그 순간에 발생하는 압축적 폭발력에 기대서 글을 써요. 나에게 쌓인 단서가 많다면 그렇게 써도 훌륭한 글이 나오겠죠. 그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순간은 아니에요.

매주 주어지는 글쓰기 주제를 어떻게 정하는지도 궁금해요. 스누트스쿨의 주제는 일관적으로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만들죠. 혹시 그런 이야기를 스스로 하고 싶거나 쓰고 싶으세요?

주제는 제 마음대로 정하는데요, 제가 쓰고 싶지는 않아요. 주제를 주고 학생들이 써온 걸 점검하는 기쁨이 훨씬 크죠. 학생들 글이 지난번보다 나아지면 더 기쁘고요. 저는 글 쓰는 거 너무 싫어요.

정말요? 왜요?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베토벤도 피아노를 되게 싫어했던 적 있어요. 잘 치지만 어떨 때는 싫기도 한 거죠.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 땐 더 싫고요. 원고를 써야 하는데 안 쓰고 있으면, 그 빚이 제일 무서운 거래요. 전 친구들하고 술 마실 때가 제일 행복해요.

글쓰기가 싫은데 어떻게 업으로 삼으셨어요?

좋아서 하는 업도 있지만, 잘해서 하는 업도 있어요. 얼마 전에는 『아카이브K』라는 음악 플랫폼에 네 번 정도 연재했는데 조금 학술적인 내용이에요. 왜 가수들은 그렇게 고음으로 노래를 할까, 왜 비브라토가 필요할까, 노래 가사의 중요성, 그런 것들이요. 제가 생각해도 잘 썼어요.

Ella Fitzgerald © Herman Leonard

글 쓰는 일이 왜 그렇게 싫으신 걸까요?

귀찮잖아요. 너무나 성가시고, 책상에 앉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허들이 많아요.

귀찮다는 건 시간을 오래 투자해야 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적절한 언어와 정확한 표현을 찾는 과정 때문일까요?

느낀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 건 할 수 있는데, 전 이렇게 생각해요. 누가 여행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비행기 타는 걸 너무 싫어해요. 공항, 시스템, 절차 다 싫은 거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맛있게 먹는 건 좋아하지만 줄 서는 건 싫을 수 있죠. 글쓰기도 일단 앉으면 쓰긴 쓰는데, 굉장한 지구력을 필요로 해요. 척추를 꼿꼿하게 세워야 하고 또 하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니까 너무 피곤하죠.

궁금한 게 있는데, 학생들의 글을 볼 때 그게 잘 쓴 글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하세요?

제가 정한 기준에 적합할 때요. 예를 들어 주방장이 ‘우리 주방에서는 냉동 생선을 쓰지 않는다.’라는 기준이 있다고 했을 때, 그에 맞춘 사람이 있다면 칭찬하겠죠. 우리 학교에 들어온 이상 제가 원하는 기준에 맞으면 저는 잘 썼다고 이야기해요. 다른 학교에 가면 다른 이유로 칭찬받겠죠. 좀 이기적인 면도 있지만, 이런 이기심에는 제가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느꼈던 학술적인 근거도 뒷받침한다고 생각해요.

매번 수업 때 강조하시는 몇 가지 기준이 있지요. 좋은 글의 네 가지 조건 말이에요.

독창성, 문법, 그리고 지식. 독창성이라 하면, 내가 겪은 상황은 우주에서 오로지 나만 겪은 건데 남의 언어를 빌려 쓸 수는 없잖아요. 그 시간이 갖고 있는 고유함을 위해선 고유한 언어가 필요해요.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나만의 삶을 담은 언어가요. 그리고 문법은 아주 중요하죠.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오문의 왕들이 너무 많아요. 김연아 선수는 점프할 때 치팅 점프를 하지 않고 정석대로 넣거든요? 보통 ‘치팅 점프’라고 해서 절반을 미리 돌고 몸을 비틀면서 뛰는 점프가 있어요. 근데 그건 진짜 점프가 아니잖아요. 제가 생각했을 때 글쓰기의 정석은 문법이에요.

지식도 중요해요. 오늘 날이 추웠다면 ‘치아가 시렸다.’도 좋지만 ‘한랭전선 시베리아의 오호츠크해 기단 어쩌고’ 같은 이야기를 끌어들이면 전 그게 지식의 내재화라고 생각해요. 글에 지식을 끌어들이면 거기서 강세가 생겨요. “오늘은 추웠어.”가 아니라 “오늘은 영하 11.7도였는데 중강진보다 추웠어.”라고 한다면 거기서 글의 표정과 윤곽이 드러나는 거죠.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네 가지 중 마지막 한 가지를 빠트리셨어요.

아, 위트. 항상 강조하지만 지루함은 현대 3대 악덕 중 하나예요. 사람들은 남 지루한 건 귀신같이 아는데 자기 지루한 건 몰라요.

『이충걸의 글쓰기 클래스』 과제 첨삭본

독창성을 얻으려면 독창적인 경험을 해야 할까요?

경험이 중요 요소긴 하지만 필수 요소는 아니죠. 그렇다면 모든 작가는 자기가 겪은 것만 써야 하잖아요. 사실 우리에게는 상상력과 감수성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해요.

상상력과 감수성은 타고나는 걸까요?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어떤 재능은 반복 훈련된 연습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느껴요. 사실 브람스 음악은 만질 수도 없고, 맛도 없고, 형태도 없잖아요. 근데 그걸 듣고 우리가 어떤 감흥을 느낀다면, 추상적인 대상에서 어떤 덩어리를 만질 수 있다면, 저는 그게 굉장히 높은 경지의 감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건 훈련할 필요가 있죠. 전 클래식 잘 안 들어요. 그렇지만 『브람스라 부르자』를 쓰면서 이 신(scene)에 적합한 음악이 뭘지 계속 고민했어요. 반복해서 듣다 보면 ‘이 부분에서 이런 걸 말하고자 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작곡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된 거죠.

사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의 대화 주제는 ‘어딘지 다른 문장은 어떻게 탄생할까?’였어요. 그래서, 어딘지 다른 문장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요? 말씀해 주신 요소를 다 갖추어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어딘지 다른 문장을 보았다면 그 예를 한번 들어볼래요?

음, 예컨대 이런 거요. 유희경은 그의 시집 『오늘 아침 단어』에서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어요.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화려한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마음에 계속 남는 문장이에요.

수사의 문제이기도 하네요. 그러니까, 수사는 굉장히 중요해요. 장면에서 이미지를 찾는 일이죠. 최근에 있었던 일을 하나 얘기해 드릴게요. 제가 얼마 전에 환갑 생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뭐라 말씀하셨냐면, 환갑 생일인 자식이 있는 부모는 쌀뜨물에도 빠져 죽는대요. 자식이 좋은 날을 맞았으니까 기뻐서 날뛰다가도, 기력이 없어 쓰러져 죽는다는 거죠. 이건 엄마의 언어잖아요. 너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또 저희 어머니가 늘 하는 말이 사람은 나무와 똑같아서 잘라보면 나이가 다 있다고, 그러니까 술 처먹고 늦게 다니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이것도 엄마의 언어죠. 똑같은 일을 다르게,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남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모든 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것들의 해석이잖아요. 가수들도 노래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서 부르죠. 근데 어떤 해석은 매력적인데 어떤 해석은 너무 진부해요. 해석법의 차이죠. 내 눈앞에 닥친 장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다른 사람은 그 사람만의 방법이 있는 거고,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편 수업에서 강조하시는 또 한 가지는 ‘삭제’예요. 하나 마나 한 소리 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시잖아요. 글쓰기에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줄여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하나 마나 한 소리의 핵심은, 그 사람이 다음에 무슨 얘기 할지 다 안다는 거예요. 복학한 선배의 주사가 왜 짜증 나냐 하면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이죠. 좋은 소리인 거 우리도 모르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 중에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옳은 거 아는데 짜증스럽죠. 애들이 백사장에 쓰러질 때도 이어지는 교장 훈화, 대통령 시정연설, 국정연설은 하나 마나 한 말들의 향연이죠. 안 들어도 뻔한 얘기. 자기도 재미없는 거 알걸요?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 ‘삭제’는 밋밋한 글을 강렬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럼 선생님은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박정자 선생님도 공연 마치고 자신이 잘했다는 걸 알죠. 가수들도 노래하고 나서 그게 상대에게 감흥을 주었는지 아닌지 너무 잘 알아요.

글을 쓸 때 보통 몇 번의 퇴고를 거치세요?

『GQ』에서 「에디터스 레터」를 쓸 때는 퇴고를 엄청 엄청, 최후의 최후까지 했어요. 더 이상 못 하겠다 싶을 때까지 하고 다시 보면 또 고칠 게 있었죠. 마지막 순간마다 제가 생각했던 건, 여기서 피곤해서 양보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인쇄되면 끝이잖아요. 요즘은 종이를 코팅해서 썩지도 않죠. 그럼 그때 방심해서 자행한 오류를 역사가 비난할 거 아니에요. 파피루스에서 발견한 글들은 헤로도토스 같은 역사가들만의 글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들 글도 결국은 남겠죠. 심지어 바이라인(byline)이 있잖아요. 에디터 누구누구. 그런데 글을 못 쓰면 후대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선생님은 글도 말하듯이, 말도 글 쓰듯이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친구들 앞에서 “야, 뭐. 눈 깔아.” 이런 거 해요.

하하, 그나저나 첨삭하시다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글이 있다는 이야길 봤어요. 혹시 어떤 글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제가 웃었다면 그 문장들이 떠올리게 하는 개인적인 기억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가끔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지?’ 하는 생각을 해요.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글쎄요. 굉장히 감동을 느껴요. 그런 문장으로 자신의 환부를 드러낼 수 있다는, 그들의 거의 무정하기까지 한 정직이요. 자기를 드러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요. 어디까지 내려갈 것인가도 정해야 하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까지 마음을 보여준 게 너무 고마워요. 학생들한테 고마운 건 너무 많아요. 근데 매주 글이 좀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첫 문장을 스카이다이빙에 비유하신 적이 있어요. 첫 문장은 왜 중요할까요?

첫 문장은 호객하는 거잖아요. 호객은 그 사람의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매력도 중요해요. 우리가 백화점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살 때는 매장 직원의 개인적인 매력 때문이기도 하죠. 첫 문장도 마찬가지예요. 매력을 느껴야 읽죠. 첫 문장 읽자마자 보기 싫었던 적 2,000만 번 있어요. 첫 문장은 너무나 중요하고, 마지막 문장은 책을 덮었을 때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주는 것.

첫 문장 쓸 때 제일 많이 고민하세요?

카프카가 『소송』을 쓸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쭉 쓰지 않았어요. 쓰고 싶은 것만 쓰고 조립했죠. 퍼즐처럼요. 어떨 땐 글을 다 쓰고 보면 이 문장이 여기보다 저기에 적절한 순간도 있어요. 첫 문장도 마찬가지죠.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쓴다고 생각하면 너무 고약스럽잖아요. 『GQ』에서 일할 때 「에디터스 레터」의 분량이 최대 12매 정도였어요. 에디터들 마감 다 끝나고 나서 이제 제가 마감할 차례인데, 너무 초조한 거예요. 애들은 막 집에 가고. 그러면 ‘아이들 기저귀 갈아주다가 내가 오줌소태에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럴 땐 처음부터 계산해서 쓰지 않고 일단 다 써버려요. 먼저 초고를 많이 쓰는 게 필요하죠. 쓰다 보면 50매가 되기도 해요. 그리고 그때부터 줄여나가요. 그럼 글이 훨씬 견고해지죠.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삭제는 재미없는 글을 강렬하게 압축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에요.

프란츠 카프카 『소송』

글쓰기에서 타고난 재능과 꾸준한 지구력 중 하나의 미덕만을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어요?

저는 가끔 글쓰기는 신이 주는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근데 지구력도 없으면 허구한 날 죄송하다고 그러겠죠.

그럼 에디터들을 막 혼내셨어요?

혼은 안 내는데 울죠, 그들이. 저는 그냥 얘기를 해요. 이 글이 뭐가 잘못됐는지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내 방에 들어올 때 이미 벌을 받고 들어오니까. 마음의 벌. 지옥에서 받는 벌은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래요. 자기 자신을 감찰하는 거요. 뜨거운 꼬챙이에 사지가 세로로 꽂히고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나요. 누군가를 혼내는 게 그 사람의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되냐고요. 스누트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엄청 칭찬해 주시는 편이라 생각해요.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저는 그걸 꼭 꺼내서 펼쳐주고 싶어요. 그 꼬깃꼬깃한 재능을요. 글을 잘 쓰는 게 뭔지 인지하게 되면, 못 쓰는 게 어떤 건지도 자연히 알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야단칠 게 뭐가 있어요? 이 학교에 찾아오는 나의 꼬마 손님들인데.

신이 주신 재능은 있는데 성실하지 못한 경우는요?

그건 너무나 많았겠죠. 화가들도, 음악가들도 재능을 술과 마약으로 낭비한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그러면 선생님은 재능은 있는데 노력은 안 하는 사람이랑, 노력은 하는데 재능이 없는 사람 중에 누구를 도우시겠어요?

일단 뺀질대는 애들은 아웃이에요. 지구력이 있다는 것은 결국 학습을 한다는 거고, 학습하다 보면 틀림없이 어떤 각성의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재능도 훌륭하지만 지구력만 한 매력이 없더라고요. 관계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냥 번쩍하는 섬광 같은 관계도 멋지다고들 하지만 지구력만은 못 따라가요. 저는 박정자 선생님과 만난 지 34년 됐거든요? 그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서로 존중하고, 또 얼마나 많이 싸웠는지 몰라요.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인간은 불안정하잖아요. 사람들은 관계를 가질 때 타인의 결핍이나 불안정함을 흉보기 쉽거든요. 남 흉보는 것처럼 재밌고 맛있는 게 없잖아요. 나는 어떻겠어요? 저는 진짜 사랑은 상대와 나의 기준이 다른 것과 상관없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 그리고 이 꼴 저 꼴 다 보고도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경험한 가장 큰 사랑은 뭐예요?

가장 큰 사랑은 저희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는 용맹스럽고 덤덤하시거든요? “어우, 우리 아들.” 그러지 않아요. 근데 저는 그런 엄마에게서 진짜 사랑을 느껴요. 또 박정자 선생님도 제가 눈이 안 좋아서 집에 있으면 엄청난 스테이크도 가져다주시고, 남편분이 만드신 러시아 수프도 가져다주시고 그러세요. 저는 항상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만큼 돌려드리지 못하니까. 근데 그럼 잘하면 되죠. 왜냐하면 인생은 생각보다 기니까.

학생들한테도 사랑받고 계신 것 같아요.

네, 그건 제가 먼저 사랑을 주기 때문이죠. 제가 무례하거나, 불성실하거나, 타인에게 수치심을 줬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 전류가 흐르지 않고 증오만 싹트겠죠.

인간을 좋아하세요, 싫어하세요?

인간은 알수록 싫어지더라고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암소, 수소한테 가서 외롭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저는 친구들이랑 술 마실 때가 제일 좋아요. 이번에 친구들과 나가사키에 다녀왔는데, 제가 눈이 잘 안 보이니까 저를 위해 같이 가준 거예요. 물론 저도 즐겁고 그들도 즐거웠죠. 술도 종류별로 마셨는데, 자다 일어났더니 볼링을 세 사람이 쳐도 될 정도였어요.

소주, 맥주, 양주, 위스키, 와인 중에 어떤 술을 제일 좋아하세요?

맥주를 제일 좋아하지만 와인도 좋아해요. 양주는 스코틀랜드에 증류소를 세 번인가 가봤는데, 그래도 매력은 잘 모르겠어요. 아, 맥주는 마시는 녹말이래요. 맥주를 많이 마시면 한 말의 쌀을 먹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살이 찌겠죠?

그렇죠. 살찌겠죠.

다음 질문이에요. 지금 『GQ』를 돌아보면 어떠세요? 다시 돌아가도 편집장 하고 싶으세요?

전 지나간 일은 잘 생각 안 해요. 어머니가 제게 물려준 좋은 성품이죠. 늘 강조하지만, 과거는 시체고 시체는 뒤적이면 냄새만 나요. 『GQ』에는 18년을 있었지만, 그만두고 나서 꿈도 한번 안 꿨어요. 항상 뭔가 끝나면 돌아보지 않는 편이에요. 잡지를 만들 때도 11월 호가 끝나면 다음 호를 만들기 전에 리뷰를 하잖아요. 저는 그것도 하지 않았어요. 인쇄도 끝난 걸 가지고 ‘너 왜 이렇게 했어.’ 하고 싶지도 않고,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GQ』의 편집장에서 스누트스쿨의 교장 선생님까지,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동일하다고 생각하세요?

바뀐 건, 거기는 사람이 붐비는 백화점에 파이널 세일 코너같은 북적거림이 있었어요. 반대로 여기는 단풍이 진 오솔길의 호젓함이 있죠. 대신 이곳엔 기근이 창궐하고, 거기선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요. 근데 결국 몸과 마음에 좋은 건 적게 먹는 거죠. 저한텐 지금이 중요해요.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잘 안 해요. 어떨 땐 스스로 고양이 같다고 느껴요. 고양이는 지금만 생각하니까.

지금 행복하세요?

행복해요.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재능이거든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죠. 저희 어머니가 고령이시고 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빼고는 다 좋아요. 학생들과 함께하는 즐거움도 매우 크고, 읽고 싶은 책도 많아요. 어찌 됐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제 기질에는 맞죠. 그 행복이 제일 커요.

근래에 가장 아끼는 순간이 있다면?

『브람스라 부르자』 마지막 공연 날이요. 박정자 선생님 컨디션이 좋아서, 그게 너무 기뻤어요. 선생님한테는 상상할 수 없는 빚을 졌죠. 근데 『영웅본색』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빌려주는 건 괜찮아. 갚을 길이 있잖아.”

삶에서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당장 글을 안 쓴다고 해서 죽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업이 아니고서야 굳이 쓰지 않는 사람도 많고요.

글은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능이에요.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게 많거든요. 근데 글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심해가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글쓰기는 너무 신비하잖아요. 자음과 모음이 합쳐졌는데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다정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음악과 비슷하지만 글은 그냥 펜만 있으면 되죠. 별다른 기계나 장치도 필요 없고요.

오늘 대화를 하기에 앞서, 이충걸의 인터뷰집 두 권을 읽고 왔어요. 『질문은 조금만』과 『해를 등지고 놀다』요. 글쓰기와 인터뷰는 어떻게 다른 걸까요?

글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접시에 사물을 올려놓는 건 똑같은데, 인터뷰 장르는 좀 더 까다롭죠. 제가 쓰는 방식이 Q&A가 아니기도 하고, 상대에게 파고들어서 감정과 반응을 보려 하기 때문에 매우 집중해야 해요. ‘이 순간, 그 사람의 감정은 이럴 것이다.’라고 적었는데 막상 그 사람은 신전떡볶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과녁을 완전히 잘못 겨눈 거잖아요. 대체로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저의 경우엔 시간의 한 톨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강박이 있어서 굉장히 지치죠.

이충걸, 『질문은 조금만』(한겨례출판, 2023)

선생님도 인터뷰 직전에 떨리세요?

떨릴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사람은 타자, 나는 투수. 타자는 투수가 볼을 던지기 전까진 영원히 벌서고 있어야 해요. 주도권은 제가 쥐고 있는 거죠. 저는 그들이 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우리가 떨어야 해요? 인터뷰는 제가 묻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잖아요. 그럼 칼자루는 제가 쥐고 있는 거죠. 우린 무례하지만 않으면 돼요. 무례할 이유도 없지만, 떨 이유도 없죠.

인터뷰어가 가져야 하는 자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인터뷰의 속성에 따라 달라요. 오리아나 팔라치가 그랬던 것처럼 나라의 정세를 바꾸는 것인지, 상대의 감정과 반응을 보는 것인지에 따라 다르겠죠. 운동에서 상대의 전술에 따라 나의 전술을 달리하는 것처럼요.

그러면 인터뷰이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요?

인터뷰이는 자세가 필요 없어요. 불친절하게 대답해도 되고, 세세하게 말해도 돼요. 그가 날 깔보고 무례하게 반말을 했다면, 그럼 그대로 쓰면 돼요. ‘그가 반말을 했다. 어제 뭘 잘못 먹은 모양이지?’ 그리고 상대가 대답을 아예 안 해도 되죠. ‘그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없나? 아니면 인색한가? 그럴 거면 왜 나왔을까.’ 이렇게요. 우리는 뭐든지 다 서술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인터뷰이가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상대가 말수가 적다고 해서 요리할 게 없는 건 아니에요. 그 자체로 모든 걸 요리할 수 있죠. 정 쓸 게 없으면 ‘다리를 떤다. 수전증이 다리로 옮겨 갔나?’ ‘눈을 깜빡였다. 안구건조증인가?’ ‘그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얼굴에 고무팩을 했나?’ 전 이렇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대가 반발하면요? 때론 그 후폭풍이 두렵기도 하잖아요.

그 장면을 정직하게 썼다면 뭐라고 할 수 없겠죠. 저는 후폭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왜냐하면 제가 왜곡하거나, 없는 말을 쓰거나, 상대가 오프더레코드라고 했는데 무시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하려는 말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쓰려고 했죠.

인터뷰할 때 사전 질문지 보내는 걸 안 좋아하신다는 이야길 읽은 적 있어요. 이유가 뭘까요?

전 사전 질문지라는 것이 희한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는 권투 시합 같은 거잖아요. 근데 질문지는 상대가 잽을 날릴 걸 알고 피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건 권투가 아니라 서커스죠. 자신 없고 실수할까 봐 그러는 건데, 생각이 안 나면 생각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또 한 가지 인터뷰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나가사키가 참 좋았어요.”라고 이야기했는데 “나가사키가 참 좋더군요.”라고 쓰는 거예요. 저는 언어를 바꾸는 건 안 된다고 봐요. 말의 보푸라기를 털어내는 건 중요하지만, 하지도 않은 말을 어미로 쓰는 건 왜곡이죠. 어투는 그 순간에 보여주는 그 사람의 언어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터뷰하고 싶은데 아직 못 한 사람이 있으세요? 이미 돌아가신 분도 괜찮고요.

달라이 라마랑 김정일이요.

하하, 이유는요?

인터뷰를 하기 위해선 그 인물이 갖고 있는 파괴력도 필요하거든요. 달라이 라마는 예전엔 멋지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GQ』 창간할 때 표지 인물로 하고 싶었는데 다들 말도 안 된다고 그랬어요. 결국엔 못 했죠.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인물의 인터뷰가 임팩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들을 인터뷰하지 않았다고 해서 『GQ』의 가치나 미디어로서의 스피릿이 후진 것도 아니어서 괜찮아요.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사실 그거는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저는 그냥 이렇게 생각해요. 오늘 이 순간은 그동안 우리가 했던 일들의 열매잖아요.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가 보여줬던 모든 태도의 열매이니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보다는 하루하루를 나태한 즐거움과, 또 필요할 때는 나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집중력으로 그 순간을 존귀하게 대하면 그것대로 어떠한 사람이 되는 거라 생각해요.

혹시 아톰 좋아하세요? 곳곳에 피규어랑 그림이 보여요.

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아톰은 텐마 박사가 자식인 토비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그 상실감을 채우려고 만든 기계잖아요. 그 자체로 유한한 것에 대한 비통함이 있죠. 어렸을 때부터 아톰의 그런 배경을 좋아했어요. 감동도 있고요.

평소에 아이 같다는 이야기 자주 들으세요?

많이 듣죠. 왜냐하면 희로애락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에요. 기쁘면 기쁘고, 슬프면 슬프고, 눈이 오면 좋고, 추우면 춥고, 그런 거죠. 무언가를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다들 기질대로, 천성대로 사는 거죠. 보통 사람들은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않으려 하잖아요. 그게 매너이거나 성숙이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저는 싫은 걸 표현하지 않기보다, 좋은 걸 더 좋다고 표현해요. 저는 항상 위선이 위악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릴 땐 어떤 아이셨어요?

어머니가 어릴 때 별명을 지어주셨어요. 책돌이. 책만 읽어서요.

기성세대는 나쁜 걸까요? 요즘은 쉽게 ‘꼰대’라는 말을 쓰잖아요. ‘MZ’라는 말이 지천에 널린 것처럼요.

다 나쁘진 않죠. 저처럼 배려 있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벼슬인 사람도 있는 거죠. 근데 나이는 ‘포용’일 수 있거든요. ‘이건 이래야 해, 저건 저래야 해.’ 하고 자꾸 함무라비법전을 만들다 보면, 결국 남는 건 내가 가진 칼로 남을 처형하는 일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칼은 결국 자기를 겨누겠죠.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남들 보고 못생겼다고 생긴 거 가지고 비난하는 애들이 더 못생겼어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궁금한 게 있어요. ‘60’이라는 나이는 어떠세요? 서른 살엔 안 보이던 게 환갑이라는 나이가 되면 보이나요?

저는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요. 현자가 되려고 나이를 먹는 것도 아니고, 서른은 서른대로의 가치가 있는 거죠. 나이가 상징하는 게 있을까요? 전 잘 모르겠어요. 제가 그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면 꼬마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없었을 거고, 함께 있는 동안 굉장히 거북했겠죠. 근데 저는 다 즐거워요. 그런 저의 성격이 고맙기도 하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실까 봐 두렵다고 하셨잖아요. 그 두려움은 어떻게 가라앉히세요?

가라앉힐 수 없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를 상상하세요?

당연히 해요. 저희 집이 삼 층이거든요? 가끔 엄마가 집에 안 계실 때, 이 층으로 내려가다가 엄마 방문을 열어봐요. 없는 걸 알면서도요. 그럼 늘 누워 있던 엄마가 안 계시는데, 그 순간에 굉장히 적막해요. ‘엄마가 안 계실 때를 미리 연습하는 건가?’ 하는 슬픈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너무 사랑하면 병이 되나 봐요. 결국 우리는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게 되잖아요. 그거 외에는 별로 걱정하는 것도 없고, 나이 먹는 것도 하나도 걱정 안 해요. 이건 좀 다른 얘긴데, 얼마 전에 누가 자기는 엄마한테만 짜증을 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엄마는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시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대하라고 했어요. 엄마는 무슨 죄가 있어서 자식의 짜증을 다 받아내야 해요? 저는 여성의 서사에서 제일 불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자식의 짜증을 받아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뭘까요?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우린 서로 익숙해지면 얼마나 방심하는지 몰라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두부 좋아하고, 식초 아주 좋아해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떡볶이에 식초를 확 넣어줘요. 저는 식초로 목욕할 수도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초요?

제일 맛있는 건 오뚜기. 몸에 좋은 건 애플 사이다 비니거.

두부는 어디서 사 드세요?

마트랑 쿠팡이요.

오늘 대화, 너무나 즐거웠어요.

어떤 점이요?

인터뷰하면서 상대를 찬찬히 뜯어보는 일이 너무 재밌거든요. 어떤 눈을 가졌고, 어떤 코를 가졌고, 어떤 유머를 가졌고, 어떻게 앉고, 이런 거요. 관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나는 어땠을 것 같아요? 저도 분해하듯 뜯어봤어요.

정말 마지막 질문이에요. 죽기 전에 단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무엇을 읽으시겠어요?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있고요. 읽고 싶은 건 많아요. 그런데 죽기 전이라고 하니까, 좀 볼륨이 두꺼운 걸로⋯.

“내가 겪은 상황은 우주에서 오로지 나만 겪은 건데, 남의 언어를 빌려 쓸 수는 없잖아요. 그 시간이 갖고 있는 고유함을 위해선 마찬가지로 고유한 언어가 필요해요.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나만의 삶을 담은 언어가요.”

『안팎』 11호
이충걸과 이야기하는 질문과 대답 사이
https://anpakk.kr/conversations/11

  • 안: 김하영, 이주화
  • 팎: 이충걸
  • 글자색: darkblue
  • 배경색: gold
  • 발행일: 2024년 1월 24일
  • 최종 수정일: 2024년 1월 28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