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현과 이야기하는
밝고 분명한 공간

6호

들어가며

누구에게나 피난처는 필요합니다. 어지럽고 불확실한 상황과 무수한 이해로 얽혀 있는 관계망 속에서 떨어져 나와 내가 나 자신으로 오롯이 있을 수 있는, 그런 초연한 공간이요. 어느 날은 퇴근길에 좋아하는 바에 들러 홀가분한 마음으로 술 한 잔을 기울입니다. 정신과 자세는 흐트러지기 마련이지만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술을 마시면 평소엔 흐릿해 보이던 사실이 되려 분명해지기도 합니다. 무엇이 분명해지냐고요? 글쎄요. 때로는 진심이, 때로는 관계가, 때로는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의 기울기가 그렇습니다.

『안팎』 6호에서는 세상에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내밀하고 현묘한 공간을 만들어온 현현과 함께 ‘밝고 분명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현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자’라는 모토 아래 밀도 있는 공간들을 선보이고 있는 서비스업 회사. ‘현현하다’라는 말의 의미와 같이 현묘하고 심오하면서도, 일편 밝고 분명한 목소리들이 공간을 구석구석 채운다. F&B, 주거 공간, 문화 공간 등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편리함을 제공하는 공간을 기획, 운영, 컨설팅하고 있으며 최근 현현의 컨설팅 프로젝트 『리퀴드유니온』을 ‘자신의 일자리 만들기 프로젝트’로 재정의 하기도 했다. 서비스업의 현실과 어려움을 알기에, 합리적이면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쉼 없이 모색하고 있다.

하이퍼링크

반갑습니다. 저희 대화에 어울릴 만한 배경음악을 고른다면 어떤 곡이 좋을까요?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과 고민했습니다.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선곡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고른 이유를 들어볼까요?

이번 인터뷰 질문지를 받고 현현의 첫 가게인 『인생의 단맛』 생각이 많이 났어요. ‘창의적 칵테일’이 주메뉴이기도 하고, 질문지에 혜화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어 자연스럽게 떠오른 곡이죠. 당시 성북동에 사무실이 있던 안그라픽스의 몇몇 분들이 자주 찾아주시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이번 인터뷰 제안을 받고 첫 가게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앗,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네, 한글 작업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메뉴의 말맛을 재밌어하셨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추측이지만요. 지금은 저희 동료였던 분이 운영하고 계신데, 이 곡은 저희들 사이에서 ‘만석 송’으로 불리기도 해요. 가게가 만석일 때 틀던 곡이거든요.(웃음)

『인생의 단맛』 초기 메뉴판

귀엽고 기분 좋은 규칙이네요. 저희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닿아 있다는 점도 신기하고요. 『인생의 단맛』 칵테일 이름은 피식 웃기기도 하고, 문학적이기도 해요.

제주도에 다녀와서 모슬포 블루라는 생애 첫 창의적 칵테일을 만들었어요.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칵테일 이름만 100개 정도 지었습니다. 영업 첫날에는 두 가지만 주문이 가능했지만 점차 레시피들이 생겼어요. 오랫동안 문학을 좋아했는데,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제 삶을 구원한 놀라운 경험이었죠. 『인생의 단맛』은 제가 가지고 있었던, 제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었어요. 이곳에 오는 그 누구도 서운하게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성심으로!

무용해 보이는 경험들은 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곤 하죠. 자, 그럼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넘어가 볼까요?

하덕현(이하 ‘현재’): 하덕현입니다. 멤버들 사이에서는 ‘현재’라고 불려요. 현현과 더불어 창업 컨설팅 프로젝트 『리퀴드유니온』을 구성원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강후(이하 ‘느티’): 느티입니다. ‘현현의 목소리’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요. 안테나처럼 회사 안팎의 목소리를 송/수신합니다. 애정과 책임을 느끼는 이름이에요. 대외적으로는 마케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멋진 이름이에요. 아무쪼록 대화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혜화동의 『독일주택』부터 창덕궁 앞 『텅』까지, 현현이 만든 공간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만 정작 그 공간을 만드는 주체는 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현재: 많은 사람이 안성탕면을 좋아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거나 관심 없는 것처럼 좋은 서비스나 제품으로만 선택되고 싶었어요. 마치 블라인드 테스트로 선택된 와인처럼 말이죠. 회사 구성원들 중에 아웃사이더와 내향인이 많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느티: 저는 현현에서 7년 차 근무 중인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게 저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고 느껴요. 현재의 ‘라면’ 비유가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표현 방식만 다를 뿐 기본이 되는 생각은 서로 동기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된 것도 이제는 현현의 구성원들끼리 어느 정도 ‘모이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거든요.

7년 차라니 대단한데요! 일은 재밌게 하고 계시나요?

느티: 크게는 늘 재밌고, 과정에서 부침은 있는 것 같아요.

현명한 표현이군요. 그나저나 느티가 왜 ‘현현의 목소리’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아요. 웹사이트에도 ‘밝고 분명하게, 깊고 심오하게’라는 문장이 현현의 결을 나타내고 있잖아요. 느티의 목소리가 그 문장을 대변한다고 느껴요.

현재: 맞아요. 저는 저희 조직에 목소리가 있다면 느티 목소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현현의 목소리라는 직책을 붙여주었어요. 느티는 대외적인 브랜딩 업무도 맡아주고 있어서 『안팎』 인터뷰에 함께하는 것도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느티 외에도 명함에는 넣을 수 없는, 현현의 구성원을 소개하는 문장을 각자 한 줄씩 적어 웹사이트에 소개하기도 했어요.

『현현』의 멤버 소개

다들 밝고 분명해 보이는 걸요. 현현의 이러한 기조는 어떻게 탄생한 걸까요?

현재: 개인적으로 조직에 대한 오래된 불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21세기고, 엄청나게 많은 기술들이 발달했음에도 비합리적이고 불투명하게 운영되는 조직이 많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정확하고 합리적으로만 일해도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처음 회사를 만들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이 조직이 밝고 분명하기를 바랐어요. 그러면서도 ‘현현하다’라는 동사처럼 쉽게 정의될 수 없는 현묘함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현현이 만든 공간들은 어딘지 ‘현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탁, 차분하고 고요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공간을 브랜딩하거나 기획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부분이 있나요?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장소성과 고유성입니다.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하면 ‘이곳에 무엇이 있으면 자연스럽고 어울릴까? 무엇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라는 고민으로 시작해요. ‘말하기’보다는 ‘응답하기’ 쪽에 가까운 것 같네요.

그렇다면 현현이 고른 장소와 공간의 분위기는 현현의 취향이라고 봐도 무방할까요? 공간마다 일맥상통하는 결이 있다고 느꼈거든요.

현재: 사실 취향이라기보다는 만든 이의 ‘성향’이 느껴지는 공간이 저한테 더 영감을 주는 편이에요. 상업 공간에 한해서 말해본다면 취향이라는 말은 소비자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요즘은 주변에 가게들이 정말 많잖아요. 프랜차이즈가 아닌 가게들은 어느 정도 변별성이 있긴 하지만, 공간을 만들거나 소개하는 방법에서는 또 다른 프랜차이즈 같다고도 느껴요. 공간에 현현의 취향을 담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장소 선정이나 공간에서 저희 성향이 드러나긴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종이라고 치면, 한지 같은 장소를 선택했을 때 나오는 결과물에는 일정한 톤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현현다운 분위기가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혹시 『텅』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을까요?

『텅』은 조금 달랐어요. 운니동이라는 위치부터 의외였거든요. 창덕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로변의 장소 선정이 예상 밖이었어요. 이전 공간들과 다르게 높은 층에 있기도 했고요.

현재: 맞아요. 저희도 그 장소를 사용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여러 우연이 겹쳐서 가능하게 됐어요.

이를테면 어떤 우연일까요? 홈페이지 『텅 비어있는 삶』 소개 글에는 ‘동시성’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해요. 처음엔 잘못 클릭한 줄 알고 잠시 당황했어요.

현재: 동시성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처음에는 우연히 『텅 비어있는 삶』 자리를 보게 되었어요. 보자마자 이 풍경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는데, 저희가 얻기에는 임대료도 높았고 수중에 돈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 시절이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 건물주랑 대화하면서 서로 호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건물주께서 예전에 『독일주택』에 손님으로 방문해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계셨고 여러 번의 미팅을 통해서 임대료를 수수료 지급 방식으로 바꿔주셨죠. 두 달간 준비했던 인테리어 공사도 여러 이유로 백지화가 되었는데, 15년 전에 안나푸르나에서 잠시 만났던 사람이 나타나서 공사를 맡아주었습니다. 연락처도 모르고 그동안 완전히 잊고 살던 사람인데 그즈음 해서 자꾸 생각이 났어요. 여러모로 놀라운 경험과 우연이었어요.

최근에는 충무로에 『필로소피 라운지』를 열기도 했죠. 이곳에는 어떤 장소성이 있을까요?

느티: 『필로소피 라운지』는 원래 인쇄소였던 공간이에요. 처음 보러 갔을 때 맛집이 즐비한 거리에서 골목 하나 들어갔더니 오래된 인쇄소가 모여 있더라고요. 노포와 새로운 가게, 공장들이 섞여 있는 을지로의 ‘바이브’가 재밌었어요. 공간에 들어서 보니 넓고 네모반듯한 모양이었고, 단이 하나 있어 근사했죠. 자연스럽게 ‘라운지’라는 이름이 떠올라 이야기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기본적으로는 늘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이 장소에 뭐가 있으면 좋을까?’

『필로소피 라운지』

현재: 필로소피 라운지는 저희 집 거실 이름이기도 해요. 혼자 살 때 처음 투룸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하나는 침실, 하나는 옷방으로 사용하고 나니까 거실이 비는 거예요. 그래서 의자 하나 놓고 ‘여기서는 사색만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보통 가족들이 함께 살면 거실은 주로 공용 공간으로 사용하잖아요. 근데 저에게 목적이 불분명한 비어 있는 공간이 처음으로 생긴 거죠. 그래서 의자를 놓고, 조명이랑 테이블도 놓고, 오디오도 두고 했는데 나중에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을 초대해서 술을 마시고 하다가 필로소피 라운지라는 이름을 떠올렸어요. 집 와이파이 이름도 ‘Philosophy Lounge’였죠.

재밌는데요? 충무로도 참 입체적인 장소잖아요. 역사의 흔적도 남아 있고요.

현재: 맞아요. 그 일대가 예전에는 명보극장 앞에 있는 최초의 먹자골목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래된 맛집이 즐비해요. 재밌는 게 ‘라운지 바’라는 형태가 90년대에는 꽤 많았지만 이제는 거의 다 사라졌어요. 요즘은 호텔이나 공항에만 남아 있죠. 필로소피 라운지는 ‘라운지 바’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구조의 공간이자 위스키 & 디저트 바예요.

인터뷰 장소로 『필로소피 라운지』를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성북동의 『헌술방』을 골랐어요. 현현이 쌓아온 성향의 집결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현재: 코로나 당시에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어요. 회사를 운영하면 매출도 중요하지만 구성원의 에너지도 중요하잖아요. 무기력하게만 있을 수는 없어서 사무실로 쓰던 5평 공간을 헌책과 이야기가 있는 와인 보틀 숍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헌술방』의 시작이에요. 동료들과 함께 헌책을 구하러 다니고, 당근마켓에서 가구를 사고, 각자 와인에 대해서 글을 쓰고. 당시에는 거의 매거진 에디터처럼 일했던 것 같아요. 그때 매출이 코로나를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됐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 정말 순수하고 즐겁게 몰입했어요. 팀워크도 좋아지고 각자의 재능도 발견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책을 좋아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 후로는 지금의 성북동으로 옮겨서 확장하여 운영 중이에요. 보는 순간 헌술방에 꼭 맞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가게를 운영하는 분들이 느꼈을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현재: 그렇죠. 그러니까 착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가랑잎이었고, 바람 덕분에 날아다닌 거였는데 제가 스스로 날 수 있다고 착각을 했던 거죠. 제가 열심히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 사업이 모두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는 엄청난 공포이자 무력감이었어요.

느티: 바에서 일하며 9시 퇴근이라니…. 처음이었어요. 장사를 거의 못 했죠. 일부 영업은 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모이거나 특히 술집에 가는 행위는 지양됐잖아요. 서로 거리를 두고 조심히 대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시기라, 환대의 에너지도 전하거나 나누기 어려워 고민했어요.

헌술방은 그러한 시기를 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까요?

현재: 조직의 에너지를 위한 거였죠. 기세가 너무 가라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상의 가게를 상상해 보고, 이름도 지어보고, 콘셉트도 정해보다가 나온 게 헌술방이었어요. 각자 와인 한 병에 대해 조사해서 글을 써보거나 취재하고, 발표해 보기도 하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이 되게 좋았어요.

그나저나 작명 센스는 타고나셨나요? 헌술방부터 독일주택, 텅 비어있는 삶, 법원···. 단순하면서도 위트 있어요. 현현의 공간들은 대체로 한글 이름을 가졌다는 점도 흥미롭네요.

현재: 저는 에버노트를 주로 사용하는데 제 기록 중에 ‘상호’라는 노트가 따로 있어요. 엄청난 상호들이 적혀 있죠.(웃음) 이름을 곧잘 짓는 편이에요. 저는 이름을 지어야 비로소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그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 메뉴, 플레이리스트가 다 정해지는 거니까요. 가게명이 대체로 한글인 이유는 말의 뉘앙스 때문인데요. 우리가 국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물론 스토리텔링도 있겠지만, 문장의 아름다움도 한몫한다고 생각해요. 그 유려한 문장과 말의 뉘앙스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거죠. 그런 이유인 것 같아요.

이름 짓는 일에 팁을 준다면요?

현재: 글쎄요. 근데 이런 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늘 이유가 있는 이름이 재밌다고 느껴요. 공간도 그렇고 “그냥 재밌잖아”는 저는 오히려 재미가 없더라고요. 혜화동의 『독일주택』도 ‘홀로 한 잔의 술을 마시네(独一酒擇)’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혼술 하기 좋은 곳이죠.

술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현재: 저는 원래 술을 안 좋아했어요. 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취한 사람을 보는 것도 힘들어했죠. 그저 술을 ‘만드는 행위’가 즐거워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자주 마셔요. 근래에는 술이 저한테 주던 긍정성이 다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그러다 최근에 장욱진의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분이 표현한 술은 어쩐지 긍정적으로 느껴졌어요. 정말 술에 진심인 분이셨거든요. 어떻게 설명했냐면, 자신의 일과 삶은 거의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시간과 휴식 시간밖에 없대요. 취미가 없는 거죠. 그런데 휴식은 자신에게 곧 ‘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을 하는 시간은 ‘선명한 시간’이고, 휴식하는 시간은 ‘모호해지는 시간’이라고 표현하죠. 그 말이 너무 와닿아서 ‘좀 더 마셔봐야겠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느티: 편하게 말해보면 술을 마시면 솔직해져요. 이완되죠. 하지만 술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무기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세모예요. 최근에 『아티스트 웨이(THE ARTIST’S WAY)』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도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요. 술이 창의성에 좋은 도구로 사용되고, 술을 즐기는 창작자들도 많지만 다른 방식을 택해볼 수도 있다고요. 영화 『어나더 라운드(DRUNK)』도 술의 긍정적인 효과와 부작용을 함께 다루죠. 술이 주는 즐거움은 여전히 있는데, 술이 없어도 좋은 시간과 대화가 좀 더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술과 관련된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면···?

‘맨정신이 마약’(『인생의 단맛』 무알콜 칵테일 이름), ‘나쁜 와인을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혜화동 『수도원』 코스터에 독일어로 쓰여 있는 문장)

저는 요즘 자영업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모로요. 그렇지만 주변에서는 쉽게 ‘나도 회사 그만두고 카페나 하나 차릴까?’라고 말하기도 하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려야 할까요?

현재: 하라 마라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에요. 다만 창업 관련해서 사람들과 대화 나누다 보면 ‘아지트’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는 조언을 하긴 하죠. ‘아지트를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라고요. 택시 기사님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손님을 내 차에 ‘태워준’ 것처럼 생각하신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저는 아지트가 그런 혐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장 생활은 고성과자가 아니어도 어떻게든 다닐 수 있지만 서비스업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유지할 수가 없다는 점이 어렵습니다. 빠르게 변하고 경쟁이 매우 치열해요. 저는 겸업에 대한 것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간혹 어떤 분들은 일정 시간만 출근하는 오토 매장을 꿈꾸지만 저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창업을 하는 분이 있다면 첫 번째 가게는 꼭 ‘사장님이 주 6일 이상 일하는 가게’였으면 좋겠다고 조언합니다.

그런 생각과 경험을 토대로 컨설팅 프로젝트 『리퀴드유니온』을 만들기도 했죠. 술로 시작해서 술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강물 같은 이름이에요.

현재: 『리퀴드유니온』은 첫 가게를 운영하던 당시에 직원들이랑 쓰던 단톡방 이름이었어요. 이 일을 하면서 우리가 이음새 없는 물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거든요. 사실 저는 예전부터 ‘컨설팅’이라는 말에 묘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다른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창업 컨설팅 프로젝트라고 불렀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자신의 일자리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재정의했죠. 저는 사람들이 지금 있는 조직이 마음에 안 들거나 혹은 더 이상 가고 싶은 조직이 없다면 결국 자기 일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중 하나가 당연히 서비스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은 대안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서비스업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죠. 한편 현현을 말할 때 ‘동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워크숍 사진만 봐도 단단한 연대감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현재: 작은 회사는 좋은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내세울 만한 게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회사의 별명을 ‘분위기 메이커’라고 지었는데 분위기의 완성도 결국 사람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라는 가치가 너무 중요해서, 반대로 다른 동료들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싶지 않아요. 느티랑도 7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번은 ‘현현에서 왜 일하냐, 어떤 점이 좋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느티가 ‘자기대로 살면서 일할 수 있어서 좋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하나의 단서가 됐던 말이죠. 조직에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런 면일 거라고 생각해요.

느티: 현재는 저에게 ‘부하 직원은 필요 없고, 우리는 동료로 일하자’라는 말을 자주 해요. 동료들과 여러모로 가까운 편인 것 같아요. 선을 넘나들거나 친구 같다는 뜻은 아니고요. 친구 관계는 우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기본으로 하지만, 일은 부정적인 소통도 꽤 있잖아요. 더 어려운 상황을 많이 만나는데, 함께 해결하며 깊은 이해와 존중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워크숍 등 기회가 있을 때는 놀이도 하고, 새로운 면모도 살필 수 있고요. 저는 동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동료들과의 소통에 있어 중요시하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앞서 이야기한 ‘정확하고 합리적인’ 방향이 동료 간 소통 방식에도 적용될까요?

느티: 소통은 늘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다만 저는 ‘사려 깊게’가 1번, 그다음이 ‘정확하게’인 것 같아요. ‘정확하게’라는 건 그 자체로 어떤 크랙을 일으키잖아요. 하지만 저는 같이 일하는 분들 모두가 이곳에 애정이 있고, 좋은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고 믿기 때문에 우선순위는 ‘사려 깊되 정확하게 소통’하는 거예요.

현재: 저는 요즘 ‘형국’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개인이 착하고 안 착하고,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형국’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그런 형국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아주 좁은 골목길에서 차가 서로 마주치면 안 좋은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형국,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안 만들려 하는 게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인상 깊은 말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과 상황이 부딪히는 일은 종종 일어나고 말죠.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일과 연대감 사이에서 냉정한 결단을 필요로 할 때 말이에요.

현재: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대표로서 많이 쓰는 방법은 ‘기다리는 것’인 것 같아요. 지금 당장 해소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 거죠. 각자 갈등을 해소하는 단계와 상태가 다 다른데 제가 이걸 빨리 해결하려 한다고 해서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기획’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상업 공간에서는 기획을 잘못하게 되면 누군가가 희생하는 일이 발생하니까요. 회사, 손님, 직원이라는 이 삼각형이 어느 한쪽이 좋으면 어느 한쪽에는 부담과 피해가 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방식으로는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에 관련해서 제가 가장 많이 공을 들이는 부분은 어떤 이득이나 이익을 가지고 싸우거나, 제가 지키고자 했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애초에 안 하려고 한다는 점이에요.

느티: 개인적으로 제가 현현에서 경험한 가장 특별한 가치는 ‘신뢰’예요. 사회에서 신뢰라는 가치를 경험한 적이 별로 없는데, 저는 이곳에서 ‘신뢰를 받으니까 나도 신뢰를 나눠줄 수 있구나.’라는 걸 배웠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일을 알려줄 때면 신뢰를 주기(하기) 위해 노력해요. 갈등 상황에서도 그런 신뢰가 밑바탕에 있는 것 같아요.

‘믿음’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지만, 가장 체득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혹시 나의 동료가 내가 어렵게 건넨 믿음을 배반하면 어떻게 하죠?

느티: 제가 딱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무 재밌네요. 저도 여전히 어렵긴 한데, 상대가 어떨지를 생각하지 않고 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신뢰할 만하니까 믿는 건 좀 더 쉬운 거잖아요. 예전엔 참과 참이 대립하는 상황이 닥치면 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정확하게’라는 칼을 더 벼르던 적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서로 다치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겪고 나니까 신뢰할 법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뢰해 버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뢰 안에서 차츰 길을 찾고 정말 잘 해내는 동료들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죠.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제가 믿음이 좀 희박한 유의 사람인데, 신뢰받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까 저도 따라가게 되는 것 같아요. 아직 한참 멀었지만요.

귀한 이야기네요. 귀한 가치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회사와 별개로, 각자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현재: 저는 ‘홀가분’이요. 원래는 ‘즐거움’이었다가 ‘초연함’으로 변했는데, ‘홀가분’으로 정착했어요. ‘즐거움’이라는 말은 내뱉고 나면 가까이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떠올라 편치 않고, ‘초연함’은 뭔가 비장하게 느껴졌거든요. 저는 원래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편애하는데, 앞으로의 조직은 아무리 뛰어난 제품과 노하우가 있어도 사람들이 일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언젠가부터 딱 맞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즐겁게’ 자리에 ‘홀가분하게’를 넣어봤더니 제가 원하는 것에 더 가까운 말같이 느껴졌습니다.

느티: 저는 사실 품고 있던 단어는 없는데 오늘 이야기 나누며 ‘성향’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되었어요. ‘취향’과 어떻게 다른가 하고요. 지금 생각하기론, 취향은 보지 못한 세계를 알아갈수록 늘어나고 변하는 것일 수 있지만 성향은 경험할수록 얼마간 좁혀지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단어 같아요. 기질과도 닿아 있달까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제 ‘성향’에 가까운 일인데, 그래서인지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더라고요. 왜 덜 노력해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단어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이 질문만큼은 『안팎』의 두 분도 대답해 주시면 어떨까요?

주화: 앗,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음, 저는 보통 단어가 가지는 ‘말맛’에 이끌리는 편이에요. 요즘에는 ‘말마따나’라고 할 때 그 ‘마따나’가 계속 입에 붙는 거예요. 스페인어 같기도 하고, ‘말한 대로’라는 뜻의 예쁜 우리말이기도 하죠. 얼마 전에는 사전에 ‘지구’라는 단어를 쳤는데 지구의 또 다른 의미 중에 ‘사귄 지 오래된 친구’라는 의미도 있더라고요. 하나의 단어를 검색했을 때 유의어가 여러 개 나오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 유의어는 전부 다 다른 맛일 거거든요. 그런 식으로 저는 점점 더 언어에 빠져드는 것 같아요. 저는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현현이 정말이지 너무나 ‘적절한 문장’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 기준에서 아름다운 문장은 ‘참 적절한 단어들이 제자리에 모인 문장’이거든요. 각자 제자리를 온전하게 지키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하영: 반대로 질문을 받는 기분은 이런 것이군요. 저는 뻔하지만 요즘은 ‘감사’라는 단어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거든요. 현실을 뭉뚱그리는 말이라고도 느꼈고요. 그런데 요즘은 감사하다는 감각을 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이 정도면 만족한다, 이대로 충만하다’라는 느낌과 비슷하죠. 누가 그러는데 ‘만족(滿足)’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발목까지 물이 찬 상태를 말한대요. 저는 요즘 만족하고 있어요. 대단한 시간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일상이 매일 무사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요.

현재: 대화를 나누다 보니 떠올랐는데, 저희 회사 슬로건이 ‘세상에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자’거든요. 근데 사전을 찾아보니까 회사(會社)와 사회(社會)의 한자가 똑같은 거예요. 두 단어 모두 ‘모일 회’, ‘모일 사’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회사가 된다는 것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어야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단어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아요. 현현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참상인의 길’이라는 표현도 있죠. 그래서 결국, 참상인이란 무엇일까요?

현재: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다른 원고를 쓰면서 처음으로 정의를 해보게 됐는데요. 참상인이란, 직업윤리를 갖고 있으며,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일하면서, 손님을 기적으로 생각하고, 이윤을 남기는 사람.

어떠세요? 참상인의 길은 걸을 만하신가요?

현재: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뒤돌아봤을 때 그런 길을 걸어온 여정이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안팎』의 구독자들에게 딱 한 가지 술을 소개해 본다면?

‘그, 나, 저, 나’ 인생의 단맛에서 판매하는 높은 도수의 창의적 칵테일이에요. 마시다가 술에 취해서 ‘그나저나’라는 단어에 쉼표를 찍어봤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마침 인터뷰를 하는 곳이 ‘안팎’이어서 떠올랐습니다. 언어가 분열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저는 사람들이 지금 있는 조직이 마음에 안 들거나 혹은 더 이상 가고 싶은 조직이 없다면 결국 자기 일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중 하나가 서비스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팎』 6호
현현과 이야기하는 밝고 분명한 공간
https://anpakk.kr/conversations/6

  • 안: 김하영, 이주화
  • 팎: 현현
  • 글자색: white
  • 배경색: deepskyblue
  • 발행일: 2023년 10월 30일
  • 최종 수정일: 2023년 10월 30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