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욱과 이야기하는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마음

5호

들어가며

때로는 끓어오르는 열정보다 강력한 동력은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폭발적인 추진력보다는 진득하고 은은하게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지구력 같은 것 말이에요. 거부감이 들지 않는 문장도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어느새 우리 마음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당도하는 타지의 문장들은 반드시 번역가라는 매개를 거쳐 마음속에 스며들지요.

번역은 한국어를 “세밀하게 나눠서 재조립하는 과정“입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한국어의 민낯을 마주하는 순간만큼 번역가보다 한국어에 몰두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안팎』 5호는 한글날을 맞아, 두 언어를 오가며 예민한 태도로 말을 다루는 번역가 송태욱과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송태욱

송태욱은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을 집필했고, 나쓰메 소세키 전집, 『십자군 이야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형태의 탄생』 『점·선·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등 셀 수 없이 많은 책을 옮겼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으로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거부감이 들지 않아서, 싫지 않아서, 우연같지 않은 우연으로 번역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지금도 언어를 다루고 있다.

반갑습니다. 저희 대화에 어울릴 만한 노래를 추천해 주세요. 좋아하시는 곡이면 더욱 좋고요.

정밀아의 「우리들의 이별」이란 곡인데, 이분의 노래는 대개 다 좋아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해주는 것 같아서요. 원래 이름은 정미라이고 활동명이 정밀아인 모양입니다.

정밀아, 〈우리들의 이별〉 라이브.

국어국문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취득하신 뒤 박사과정 때 도쿄외국어대학교에서 연구원을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어에서 외국어로 활동 범위를 넓힌 이유는 무엇인가요?

활동 범위를 넓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연세대 국문과와 도쿄외대 조선어과(현 한국어학과) 사이에 교류가 있었어요. 문부성에서 장학금이 나와 그냥 지원했는데 일반적으로 학번순으로 뽑히는 거라 안 될 줄 알았어요. 그때는 광복 50주년으로, 아주 특별한 해여서 세 명을 뽑는 바람에 얼떨결에 뽑히게 된 겁니다. 장학금 준다고 하니까 그냥 갔다 오자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우연히 그렇게 된 거라고 해야겠지요.

우연이 시작이었군요. 그전에는 외국어에 관심이 있었나요?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 지하에서 팸플릿으로 돌아다니는 속성 일본어 같은 게 있었어요. 일주일만 공부하고 바로 일본어로 된 사회과학책도 읽을 수 있게 하는, 그런 건 좀 배워서 책을 봤던 것 같습니다.

언어가 그리 큰 장벽의 존재는 아니었던 건가요?

아뇨, 큰 장벽입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런 외국어와 관련된 수많은 작업 중 번역에 적을 두신 이유가 있나요?

저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한테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성격과 맞는 일이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그냥 끌리는 거 있잖아요. ‘할 수 있겠다’는 생각. 거부감 같은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우연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전에 관심이 있었을 겁니다. 일본 작가의 소설도 좋아했고요. 일본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도쿄외대 지원서도 선뜻 내기 힘들었을 텐데 결국 낸 걸 보면 어딘가 관심이 있었던 것 것 같습니다. 우연이지만 뭔가 준비가 돼 있었겠지요.

‘싫지 않아서’ ‘거부감이 들지 않아서’라는 건 굉장히 강력한 이유 같아요. 그 대상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데 아주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번역도 굉장히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딘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번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다른 대학 선배가 요즘 재미있는 일본 책이 없는지 물어봐서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라는 책을 추천해 줬는데, 그다음 주에 혹시 번역해 볼 생각이 없는지, 만약 있다면 출판사를 연결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게 됐어요. 제가 나서서 번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기회가 주어진 거죠.

모든 일이 다 그런 것 같아요. 특별히 번역을 하려고 꿈꿨던 것도 아니고 노력한 것도 아니지만 뭐랄까… 하기 싫은 일 안 하고, ‘할 만하다’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로 간 거겠지요.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다기보단 싫지 않아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정도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016년 12월 23일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번역이 역자와 작가 사이의 대결”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요? 번역가님이 생각하는 ‘번역’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주세요.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번역으로 출판문화상을 타고 난 뒤 한국일보와 인터뷰할 때 했던 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다 까먹고 있었어요.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참 쑥스럽습니다. 이렇게 건방졌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그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겠습니다. 소세키라는 작가의 작품이 100년도 더 됐고, 그동안 언어는 굉장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독립선언문에 쓰인 언어와 비슷한 거리감이지요. 그만큼 오래된 글이라 번역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소세키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 자체가 ‘과제’여서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나쓰메 소세키, 1912년 9월 13일.

소세키의 작품에는 요즘 작가들의 작품과 다르게 그 사람만 쓰는 단어가 있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용례가 오로지 소세키 작품 하나인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용례가 나오면 대충 뜻을 파악할 수 있지만, 오로지 그때 번역하는 소세키의 작품의 그 문구가 그대로 예문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본인이 말을 만들어서 썼다는 얘긴데, 당시에는 현재의 일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었으니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번역이 “역자와 작가 사이의 대결”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수수께끼 푸는 행위”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품 전체가 그렇지는 않아요. 대화 같은 대목은 평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세키 작품에는 곳곳에 난관이 버티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소세키 작품을 번역할 때는 ‘나는 소세키가 내놓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청소부라는 단어를 예로 드신 것 같아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또 떠오르는 건 소세키의 『우미인초』(현암사, 2014)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의 묘사 부분은 거의 한문 수준입니다. 어떤 사람이 작품의 묘사 부분을 번역한 걸 봤는데 얼굴 묘사를 자연을 묘사한 것으로 옮겼더라고요. 얼굴 각 부위를 자연물에 비유한 부분이어서 자연 묘사로 착각한 것이지요.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수수께끼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미인초』 표지

그 외에 일반적인 ‘번역’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마다 다르고 분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니까요.

그렇다면 소세키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스스로 확신을 얻었을까요?

그동안 저도 많이 틀렸겠지요. 확인을 못 해봐서 그렇지, 실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실수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실수니까. 그런데 번역할 당시에 의심을 하면서도 그냥 넘어간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확신은 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확인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최소한 납득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넘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합정역 근처에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서 주로 소세키 작품을 작업했습니다. 『우미인초』를 작업하다가 한 문장인가 한 구절을 번역하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30분쯤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30분을 쓰면 번역 일 못 하거든요. 어떤 문장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동안 어떤 작품들을 번역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 인터넷 서점에서 그동안 번역한 책들이 뭐가 있나 쭉 훑어보기도 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선생은 영어 교사로 재직할 당시 일본인은 직접적인 사랑 표현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로 번역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번역가로서 원문에 대한 충실함과 번역가의 창조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는 편인가요?

이 인터뷰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 같습니다. 소세키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인터넷에서 여러 번 보긴 했는데 직접적인 출처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 일화는 번역가의 창조성 또는 의역이 필요하다는 사례로 말하는 것 같아요. 음… 그러니까 상황에 맞게 의역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소세키의 성격상 학생들한테 번역을 이렇게 ‘하라’라고 했을 것 같진 않아요.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표현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했겠지요.

요즘 사람들 말로 ‘라면 먹고 가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것도 돌려서 말하는 하나의 의사 표현이죠. ‘달이 아름답네요’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상황이나 문맥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현일 겁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특별한 관계, 특별한 상황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의미부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집필 당시.

예컨대 이 일화를 두고 원문에 대한 충실함(직역)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의역을 택할 것이냐, 이런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소세키는 의역 쪽을 택한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번역을 이야기할 때 이런 양자택일의 논의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의역과 원문에 대한 충실함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직역’은 서툰 번역일 뿐이지, 원문에 대한 충실함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흔히들 ‘직역’을 원문에 대한 충실함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직역처럼 보이는’ 게 좋은 번역인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직역하는 것이 좋은 번역에 가까운 작품이 있고, 또 직역에서 멀어져야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작품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괄적으로 직역 또는 의역, 둘 중 하나를 정할 수는 없어요. 예를 들면 정보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는 책의 경우는 사람들이 직역에 가깝다고 느낄 거예요. 물론 직역은 아니겠지만요. 이런 책은 원문의 표현을 살리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문학 작품은 조금 다릅니다. 시 같은 경우는 원문에서 멀어진 것 같아도 오히려 그편이 원문을 더 충실하게 번역한 것일 수 있습니다.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번역한 건 원문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사랑한다는 뜻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잖아요. 그러니까 일괄적으로 정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런 생각은 번역가의 신념처럼 고정된 게 아니라 늘 변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작품을 할 때는 그런 것을 고민하지만, 또 다른 작품을 할 때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이 말들 또한 지금의 생각일 뿐이겠지요.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번역은 낭만적일 수 있겠어요.

사실 번역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번역의 90%는 기계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굉장히 건방진 말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기계적’인 대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목수라도 누구의 손놀림인지에 따라 작품에서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숙련도가 드러납니다. 이런 부분을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아무나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잘해서가 아니라 해봤기 때문에, 그 길을 가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겠지요.

길을 걸어갈 때 의식하지 않고 걷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어요. 아기들은 걸을 때 걸음 하나하나 굉장히 의식하면서 걷잖아요. 뒤뚱뒤뚱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런데 어른들은 의식하지 않은 채 길의 상황과 조건에 맞춰 넘어지지 않고 걸어갑니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라며 다 걸은 뒤에 생각하곤 하지요. 운전도 비슷해요. 초보 운전자는 조금만 운전해도 긴장하고 땀 흘리고 모든 걸 의식합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고 길이 익숙해지고 운전에 능숙해지면 졸리기까지 하잖아요.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번역을 하기도 하고, 졸며 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내가 진짜 했나 싶을 만큼 전혀 그 과정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기계적인’ 번역 작업 중에도 꼭 지키는 기준이나 규칙 또는 생활 패턴이 있나요?

꼭 지키는 기준이라기보단 제가 편해서 하는 방식인데, 원서를 미리 읽지 않는 일입니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미리 읽어버리면 하기 싫어져서입니다. 한 번 본 드라마를 다시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미리 읽지 않습니다.

이전 인터뷰에서도 말한 것인데, 사실 번역이란 60분짜리 드라마를 2분, 3분씩 끊어 보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느린 속도로 번역하다 보면 작품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나중에 편집자가 교정지를 보내 오면 그제야 한번 쭉 읽으며 재밌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교정에 신경 쓰다 보면 내용이 잘 안 들어오기도 하죠. 그래서 번역가는 책 읽기가 힘듭니다. 남의 책을 읽어야지, 자기가 번역한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소세키의 작품들은 줄거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때그때 소세키의 표현에 감탄하며 했던,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요즘엔 ‘이 사람, 참 대단하다.’라고 느끼는 작가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런데 소세키는 그저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더군요. 다른 걸 떠나서 그 사람의 문장력과 해박한 지식에 ‘이 사람은 못 당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하고는 상관없이요.

독자 대부분이 원작에는 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원작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만든 책이라 흠이 있습니다. 물론 번역의 질이 낮은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원작의 문제가 번역의 문제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번역가님이 작업하신 책 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서커스출판상회, 2019)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그 책을 계기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의 스승인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 중 좋다고 말한 문장이 있어요. 비 내리는 시골길 풍경을 “사립문 열고 밖으로 나가니 커다란 말 발자국 속에 비가 가득 고여 있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에요. 겨우 한 문장인데 제게도 아직까지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소세키의 전집은 얼마나 대단할까 읽기도 전에 떨리면서도 두 손 두 발 들듯 너무 무력화될까 봐 걱정도 되더라고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나쓰메 소세키와 굉장히 닮았습니다. 둘 다 아주 천재적이고 정신이상 증세가 있기도 했고요. 그런데 소세키는 병으로 죽었지만 아쿠타가와는 자살했습니다. 죽음에 다가가며 자신을 자기 작품에 그대로 담아낸 것은 같을 겁니다.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이라든지 「어느 바보의 일생」이라든지, 오히려 정신이상 증세를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는 데 열중하는 것 같았죠.

네, 마치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것처럼요. 그런데 소세키는 그런 정신이상 증세를 치료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글을 씁니다. 그리고 실제로 글을 쓸 때는 증세가 조금 좋아지기도 하고요. 이런 점에서는 아쿠타가와와 정반대입니다. 말씀하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도 번역하는 데 매우 힘들었어요. 예전 헤이안 시대 때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고어와 고문이 많이 나와서 힘들었습니다.

저도 그 책 읽으면서 옛날 집 구조라든가 등(燈)이라든가, 옛날에 쓰이던 물건들이 많이 등장해서 번역가님께서 힘드셨겠다고 짐작했어요.

소세키도 그렇고 그 당시 작가들의 작품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예컨대 기모노는 우리나라에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기모노에는 여러 가지 부속품이 굉장히 많습니다. 옷감부터 시작해서 아이가 매는 띠, 어른이 매는 띠, 오비(帯) 위에 또 묶는 것 등 종류가 많아서 번역하기가 쉽지는 않지요.

문학이란 시대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기모노와 같이 사용하는 단어나 물건의 표현 방법도 계속 바뀌잖아요. 그러면 번역가님은 번역하실 때 그런 단어나 물건을 어떻게 검색하거나 수집하는지 궁금해요.

일본 사이트의 도움을 받는 것밖엔 없습니다. 야후재팬에 들어가서 검색하는 게 최고죠. 안그라픽스 책 중 『점, 선, 면』을 번역할 때도 일본의 집 구조는 우리나라와 굉장히 달라서 많이 검색하며 작업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검색하면서 느끼는 건, 우리는 용어 만드는 일에 참 소홀하다는 점이에요. 일본은 처음부터 외국어를 번역어로 만드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외국어에 대응하는 용어가 대충 있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본말을 가져다 썼습니다. 우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편한 길을 택했던 결과이겠지요.

돌려서 잠그는 잠금 장치, 사시코미

예를 들면 옛날에 일종의 자물쇠를 돌려서 잠글 수 있는 문이나 창문이 있었잖아요. 이 자물쇠를 사시코미(差(し)込み)라고 하는데, 저는 이걸 한국어 명칭으로 불러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번역할 때 이런 단어가 등장하면 참 난감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책을 번역하면서 외국어와 모어의 경계가 흐려지지는 않았나요?

외국어와 모어의 경계가 흐려지기보다 오히려 경계가 아주 뚜렷하게 보이고 의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엔 ‘다르다’ ‘소통이 안 된다’ 정도지만 번역을 할 땐 한국어에 없는 것들이 보이거든요.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우리에겐 이런 게 있는데 여기엔 없네.’라며 한국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국어, 아니 언어 자체가 불투명하고 모호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어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우리는 온갖 단어와 문장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이해하니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번역은 그 덩어리를 세밀하게 나눠서 재조립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한국어가 명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익숙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불완전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다른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지가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언어가 익숙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문장을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요. 이런 차이가 한국어 문장에서 굉장히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일본어가 모어였다면 일본어에 익숙해서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문장이 있는데, 사실 누구도 그렇게 읽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이미 익숙한 대로 해석하기 때문이죠. 그럴 때 말이란 것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번역하실 때 사전을 많이 참고하는 편인가요?

네, 많이 참고합니다. 네이버 사전다음 사전을 주로 활용합니다. 의미가 모호할 때 제일 좋은 건 일일사전을 찾아보는 겁니다. 용례도 많이 찾아보고요.

일본어를 더 많이 검색하시나요, 한국어를 더 많이 검색하시나요?

당연히 일본어 검색을 많이 하지만 의외로 한국어 검색도 많이 합니다. 저는 국문과를 나왔고 스스로 말에 대해 아주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도 모르는 한국어가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밥 먹었냬.’라고 할 때 ‘-냬’를 최근에야 한 번도 글에 써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로만 하다가 글로 옮기려고 하면 때론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사전을 많이 찾아볼 수밖에 없는데, 사전을 자주 찾다 보니 여러 가지 불만도 생겼습니다.

예컨대 첫 번째로, 사전도 인터넷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요즘 사전은 그림이나 사진 자료를 활용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림이 추가된 단어는 여전히 극소수죠. 어디선가 사전에 등재된 어떤 채소의 정의만 듣고 어떤 채소인지 알아맞히는 퀴즈를 본 적이 있는데, 몇 월에 꽃이 피고 한약 재료로도 쓰인다는 식의 정의만 기술하니까 도무지 맞힐 수 없었지요. 사전에서 사진을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에 자세한 정의를 적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토마토의 정의

건축 용어도 그렇습니다. 대들보 같은 특정 건축 구조물의 명칭들이 있는데 모두 사진으로 알려주면 얼마나 편할까요. 그런데 또 건축 전문 사이트에 들어가면 대체로 전문가들이 그린 그림들만 있어서 초심자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경우엔 사전에서 그림으로 쉽게 풀어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는 게 불만입니다.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지만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을 돌려서 맞춤법을 확인한다 해도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기계로 완벽하게 검사하긴 힘들 겁니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굉장히 헷갈리는 것들은 둘 다 허용하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띄어쓰기도 쓰는 사람에게 맡기는 거죠. 띄어쓰기의 목적은 쓴 사람의 의도대로 읽게 하는 것이니까요. ‘해 질 녘’이 맞지만 ‘해질녘’이 더 잘 읽힐 겁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편하고 불편하고의 문제로 바꾸면 어떨까 싶습니다.

매년 분기마다 한글 맞춤법이 조금씩 개정되다 보니 출판 편집자분들은 개정안에 맞춰 편집 원칙을 바꾸기보단 지금까지 해온 대로, 또는 사람들의 말 습관에 따라 편집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한순간에 개정됐다고 해서 지금까지 써온 말 습관을 바꿔야 하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라면서요.

저는 띄어쓰기를 왜 하느냐,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읽기 편하도록 하는 건데, 그렇다면 맞고 틀리고를 가려내기보다 가독성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하겠지요. 문법도 그런 거잖아요. 문법에 따라 말하는 게 아니라 말에서 찾아낸 규칙이 문법이니까요.

저는 사전 검색이 습관화되어 띄어쓰기를 확인하는 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사전을 검색하는 양이 줄어들진 않더라고요. 또, 사전을 읽을 땐 정의보다도 용례를 더 많이 참고하고 메모합니다. 용례에서 이 단어가 실제로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지 오히려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일본어에 ‘도리쿠무(取り組む)’라는 말이 있어요.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몰두하다’라는 뜻이 나와요. 그런데 여기서 사전은 번역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어떤 블로그에 이 단어의 다양한 용례가 정리돼 있었는데, 저는 그 자체를 복사해서 저장해 두고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 용례들을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쿠무’는 ‘몰두하다’와 크게 상관없이 쓰입니다. 일하다, 활동하다, 임하다, 힘쓰다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고, 아니면 번역하지 않는 편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너무 익숙해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습관적으로 많이 쓰는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부분은-’ 중 ‘부분’을 습관적으로 많이 쓰지만 실제 ‘부분’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상관없이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점은’ ‘그것은’에 가까울 때는 ‘부분’을 살리면 안 될 겁니다. 이처럼 한 사회에서 습관처럼 쓰고 있는 말을 단어 그대로 옮겨버리면 이상해질 겁니다.

일본에서는 한때 ‘간지(感じ)’라는 말로 문장을 종결하곤 했습니다. ‘느낌’이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하는 느낌’이 되지만 실제로 그렇게 옮길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번역을 이야기할 때 의역이냐 직역이냐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수많은 책을 번역하시고 나서 마음에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는 작가와 문장이 있나요?

그때그때 다릅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게 가장 중요한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문장은, 당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쓰메 소세키 전집의 표지나 뒤표지에 있는 문장들도 아마 거기에 해당할 겁니다. 제가 고른 것들이니까요.

번역하신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든 한글 서체는 무엇인가요? 책으로 말씀해 주셔도 좋아요.

현암사에서 나온 『책으로 가는 문』(현암사, 2013)이 정말 좋았습니다. 종이의 질감 때문인지, 여백 때문인지, 서체 때문인지 한글이 참 예쁘게 느껴졌습니다. 구성도 편집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변화무쌍한 편집보다 차분하고 단순한 편집이 좋습니다. 물론 현암사의 나쓰메 소세키 전집 표지는 시안을 보자마자 제가 생각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다고 느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디자인을 한 나윤영 씨에게는 직접 그런 감상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편집 디자인: 나윤영 디자이너)

두꺼운 서체나 돋움체를 본문에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또, 붓글씨체는 인쇄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번역해 보고 싶은 책이 있나요? 이미 나온 책도 좋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우국(憂國)』이라는 단편집인데 소설가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우국」이 실린 그 작품집입니다. 「우국」은 1966년 일본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영화로 제작했고, 국내에는 1983년 김후란 시인이 번역해 소개됐습니다. 이후로는 달리 번역된 바가 없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우국」 일본어 원문에서 확인한 표절 문장들은 굉장히 평이한 문장들이었습니다. 한국어로 옮길 때 직역하듯 독특하게 번역했더군요. 그런 직역투가 우리에겐 낯설고 생소한 표현으로 다가와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원문을 보니까 그리 특별한 문장이 아니었어요. 정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표현은 원문에서 그냥 ‘기쁨을 알게 되었다’ 정도의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색하게 번역하니까 오히려 문학적인 의미가 살아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표절 논란과 관계없이 저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데 작품 속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거든요.

최근 일이 아닌 취향에 따라 읽은 책이 있나요?

책을 워낙 안 읽습니다. 맨날 드라마와 영화만 보는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것 중에서 〈멜로가 체질〉(2019)이라는 드라마는 정말 세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그보다 뛰어난 드라마는 많이 보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나의 아저씨〉(2018)〈미스터 션샤인〉(2018)도 좋았습니다. 역사를 알기 위해 드라마를 보지 않듯 역사를 검증한다는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적 경향도 생각할 필요 없고, 그냥 드라마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표현과 영상미가 너무 좋아요. 그리고 천우희, 김태리 배우의 팬입니다. 〈우리들의 블루스〉(2022)의 이병헌은 거장의 경지에 오른 것 같고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여기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명문이라고 생각하는 문장, 최근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밑줄 긋고 싶은 문장, 어느 쪽 문장이 더 많았는가 생각해 보면 드라마에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엔 대중적인 장르가 소설이었지만 오늘날의 대중적인 장르는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일 겁니다. 제 안에 문학예술 장르의 암묵적인 등급 같은 게 있다면 소설이 맨 위에 자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치를 재조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멜로가 체질〉을 쓴 이병헌 작가와 김영영 작가, 〈미스터 션샤인〉을 쓴 김은숙 작가를 비롯한 뛰어난 드라마 작가들은 우리가 위대한 소설가라고 여기는 사람들 이상으로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이별을 노래한 시 중에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2004)보다 절절하게 와닿는 시는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장르와 상관없이 좋은 것은 좋다고 평가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준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될까 봐 걱정하기도 합니다. 인류가 문학에서 지향해야 하는 것은 시장과 상관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요.

스가 아쓰코, 《문예별책: 스가 아쓰코의 책장》 표지 사진.

읽고 있는 책도 하나 말해보자면,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입니다. 어딘지 이유 없이 읽게 하는 힘이 있는 작가인 것 같아요. 지식, 지위 따위와 상관없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그런 인간을 보는 즐거움 같은 게 있습니다. 부랑자, 창부, 철도 노동자 등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데, 아무런 벽이 없어 보여요.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느낌도 없고, 그냥 사람과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눈이라는 건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인간에 대해 안심을 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내용이라 우리와 크게 상관없는데도 그런 분위기 때문에 찾게 되는 책인 것 같아요. 스가 아쓰코의 책은 지금까지 다섯 권을 번역했는데, 며칠 전에 여섯 번째로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이라는 책을 계약했습니다. 내년쯤 뮤진트리에서 나올 거예요. 이렇게 제가 좋아한 책을 번역까지 하게 되면 참 좋습니다.

그러면 이 책을 번역하셨을 때도 소세키 전집을 번역했을 때처럼 원고에 압도되거나, 아니면 지루하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두 작가의 성격이 워낙 다르고 또 제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전혀 다릅니다. 다만 번역 작업은 둘 다 지루했습니다. 아니, 번역은 그저 지루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때는 너무 지루해서 드라마 같은 걸 틀어놓고 작업한 적도 있는데, 그때는 제가 번역에 대해 가장 건방졌던 시기인 것 같아요. 드라마를 틀어놓으면 지루함을 없앨 수 있어서 오랫동안 번역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 대신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번역을 하는 태도로서 최악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번역은 사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일인데 그런 행동은 상대방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니까요. 물론 지금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번역이란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쉬워지는 일인가요?

쉬워지는 부분도 있고 어려워지는 부분도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에게 ‘글쓰기가 쉬워요?’라고 묻는다면 둘 다 어렵다고 얘기할 겁니다. 각자의 기준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보다 조금씩 높으니까요. 그런데 쉬워지는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고민했던 것들이 대체로 반복해서 등장하니까 다음 차례에 고민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지요. 문제는 기대가 조금씩 높아지는 반면에 육체적인 능력은 점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2시간을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쉬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는 못 합니다.

경험에서 우러난 건지 나이가 든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 잘난 맛에 살던 때가 지나가고 이제는 스스로 겸손해지는 시기가 다시 찾아온 것 같습니다. 예전엔 책을 번역한다는 일이 그저 ‘내 일’이었는데, 지금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번역이 쉬워지지 않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쉬워진다는 건 조금 전 말씀하신 것처럼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기계적으로 번역하게 되는 걸 의미하겠군요.

네, 그렇죠.

번역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인 만큼 많은 사람이 번역가는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는 직업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실 번역은 외국어보다도 한국어와 더 가까워야 하는 직업 같습니다. 외국어보다 한국어와 더 친밀하고, 어쩔 땐 애증의 관계가 될 때도 있을 것 같고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한국어를 더 조사하고 고민하고 몸살이 날 만큼 씨름하게 될 것 같아요. 번역가님의 한국어와의 관계, 그리고 외국어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이 질문은, 외국어는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반면에 한국어는 소홀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는 전제가 깔린 질문 같습니다. 그러니까 외국어 못지않게 한국어 실력도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외국어보다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가면 안 되겠지요.

당연히 외국어 실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까지 잘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좋은 번역을 하려면 외국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특히 문학작품은 그게 안 되면 힘들 겁니다. 정보를 다루는 글은 사전을 찾아보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분위기나 어감 등의 요소가 중요한 문학작품은 외국어 실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외국어 실력이 좋다고 해서 좋은 번역이 되느냐, 그건 절대 아닐 겁니다. 한국어에 대한 어감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오히려 그런 어감 차이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유리할 겁니다. 어미 하나를 붙일 때도 두 사람의 관계 또는 복잡한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거니까요. 어떤 단어에 대한 각자만의 인상도 자기도 모르게 번역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예전에 소세키 작품을 할 때인데 ‘산보(散步)’‘산보’라고 번역했는데 편집자는 ‘산책’을 제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대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2-30대는 잘 쓰지 않는 말이기에 당연히 ‘산책’이 더 익숙하겠지요. 그런데 1900년대 초 작품에서 ‘산책’이라고 해버리면 상당히 근대적인 행위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산보’라고 하면 정해진 코스도 없고 느긋할 것 같고, 아무튼 근대적일 것 같진 않지. 산책 코스는 말이 되지만 산보 코스는 좀 어색한 것처럼요. 산보 쪽에는 그런 식의 다소 고리타분한 ‘냄새’가 있거든요.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이 단어만큼은 양보하지 못했어요. 저는 번역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고, 이런 요소 하나하나가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숙집’과 ‘하숙’을 예로 들 수도 있겠네요. 제 독서 경험으로는 하숙을 나온 것과 하숙집을 나온 것은 굉장히 달라요. ‘숙’과 ‘집’이 동어반복이라서 피해야 된다고도 하지만, 저는 아무리 봐도 ‘하숙집’은 우리나라에서 60년대 이후 서울로 유학 온 하숙생들이 묵는 집 같아요. 반면에 2-30년대의 ‘하숙’에는 하숙집의 ‘냄새’가 안 나요. 요즘 나오는 작품들에서도 의식적으로 옛날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런 말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고학생은 하숙보다는 하숙집에 어울리는 그런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말에 대한 감각은 번역가에게 필요한 한국어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리퍼는 보송보송하고 실내에서만 사용해야 할 것 같지만 쓰레빠는 물에 젖어도 되고 동네에서 찍찍 끌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방에 쓰레빠를 신고 들어가면 안 되겠지요. 샐러드는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가 뿌려진 음식 같지만 사라다는 감자, 계란, 사과가 마요네즈에 섞여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거지요. 사전에 같이 올라 있다고 해서 같은 단어가 아닌 겁니다.

요즘에는 그림책과 어린이책 번역 작업도 많이 하시더라고요. 초기에는 많이 안 했지만 요즘 들어서 이런 책을 자주 번역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나요?

전혀 없어요. 그냥 의뢰가 들어와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재밌긴 해요. 아주 빨리 끝낼 수 있어서 일정과 상관없이 일이 들어오면 다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책만의 규칙이 있는데,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번역가님이 옮긴 책 목록에서 어린이책, 그림책 같은 책들이 사뭇 갑자기 등장해서 혹시 이 분야를 중요하거나 즐겁게 여기고 계신가 궁금했어요.

기억나는 건 있어요. 일본 TV에는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는 종종 나오지만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동화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일본 방송에서 FTM 트랜스젠더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인데 어린이책에 이를 질문하는 내용이 나와서 놀랍기도 하고 굉장히 새로웠습니다.

네, 요즘 어린이책은 어른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들을 끌어내고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렵지 않게, 어린이의 수준에 맞춰 번역하려 하다 보니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 어쩌면 우린 독자에게 너무 끌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최소한 지켜야 할 것들은 지키면서 대중성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지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없어지는 단어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아이들에게 어려워서 쉬운 말로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은 대체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데 의미와 분위기를 바꾸면서까지 ‘쉽게’ 옮기는 건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좀 다른 얘기이긴 합니다만, ‘고맙습니다’와 ‘감사합니다’는 쓰임이 다릅니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쓰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지요. 한자어 대신 순우리말을 사용하자고 해도 ‘식사하다’를 ‘밥 먹다’로 항상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맞춤법, 순우리말, 사전 등을 신념화해서 관철하려 드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언어는 현실에서 쓰이는 말을 따라가야 하는데 마치 규칙이 언어를 끌고 가는 느낌입니다. 또한 단어가 어렵다면 사용하지 않을 게 아니라 배워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문해력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억지 부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명확하게 떨어진 것 같습니다. 물론 문해력이 떨어진 만큼 다른 분야에서는 뛰어나겠지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문해력 저하를 부정할 순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떨어져도 상관없는가? 분명한 건 삶의 다음 단계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어려운 말을 배척하다 보면 결국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끔은 어린이를 너무 어린이 취급하는 것 같아요.

어려운 말과 전문 용어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반대로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의 언어로 잘 풀어 쓸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학술 논문으로만 소통하는 지식인들이 있잖아요. 그런 경우는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여러 수준에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전문가들이 쓰는 용어는 분명 어렵고 이를 대중에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 중에서 ‘금일’ ‘심심한 사과’ 등을 이해 못 하는 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안 읽어서가 아니라 생소한 말에 의문을 갖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요. 모르니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결국 자기를 의심해 보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쉬워져야 하는 건 맞겠지요. 특히 법률 용어, 의료 용어는 대중을 상대로 하지만 쓸데없이 어려운 말들은 쉬운 말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일본식 표현을 줄여야 한다는 말도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식 표현을 쓰면 안 되는 게 아니라 같은 뜻의 우리말이 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식 표현을 고수하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말에 없으면 가져다 쓰는 게 맞을 겁니다. 학술적 용어나 전문적 용어는 대체로 일본식 표현이니까요. 예를 들어 지금은 군대에서 ‘총기 손질’이라고 말하지만 과거엔 ‘총기 수입(手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말은 ‘총기 손질’이라는 같은 뜻의 우리 말이 있는데 쓸데없이 일본식 표현을 쓴 것이겠지요.

바꿔야 할 건 안 바꾸고, 바꾸지 않아도 될 것은 또 쓸데없이 문제 제기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려운 말은 어려워야 합니다. 쉬운 말이 담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포한다면 그 단어는 그렇게, 어렵게 존재해야 하겠지요.

오직 한국 독자만을 위해 좋은 책들을 우리말로 존재하도록 하는 번역임에도 번역가에 대한 처우는 여전히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번역하면서 부딪힌 현실적인 문제들은 무엇이었고 또 번역의 가치를 아는 사회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번역가에 대한 처우가 좋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처우라는 건 시장이 결정하고, 시장 없이는 번역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시장 없이도 번역이 존재한다면, 즉 국가가 번역에 필요한 자원을 지원해 주고 국가 사업으로 전개한다면 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겠지요.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엔 시장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간섭할 수 없을 겁니다. 다른 수단으로 보조할 수는 있겠지만요.

저도 물론 처우가 좋아졌으면 좋겠고 국가가 나서주길 바라지만, 과연 한국 사회가 그런 것을 요구할 단계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면 까마득합니다.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으려면 사회의 다른 문제들이 대충 해결된 상태여야 하겠지요. 번역과 출판이 중요하다고 말만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나타난 현상인데 어쩌겠어요. 예산도 매년 깎이기 때문에 허망한 기대 아닐까요?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때늦은 감이 있고 AI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 자체도 의미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번역의 가치를 아는 사회는 오지 않겠지요. 번역의 가치를 아는 사회는 책의 가치를 아는 사회일 텐데, 보통 말로는 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유용한 것이라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요. 책이 유용하다고 강요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AI 번역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은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조만간 출판사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될 것 같기는 합니다. 번역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출판과 편집만 해서 책을 낼 수 있는 시기가 곧 닥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용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옛날 책이라든가 기계가 번역하기에 까다로운 책들은 있겠지만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책들은 어렵지 않게 AI가 대체할 거라고 봅니다. 요즘 기술은 1-2년 사이에도 엄청나게 변하니까 앞으로 조금만 지나면 안 좋은 번역가의 초고 상태까지는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개인이 AI보다 뛰어날 수 있겠어요.

저도 자료 조사 하면서 챗GPT, 파파고, 구글 번역 등 다양한 번역기를 사용해 봤는데 아직 성에 차진 않더라고요. 아무리 평범한 문장이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오는 그 묘미가 번역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매력을 느끼긴 힘들었어요. 물론 AI도 각각 다르게 번역하긴 하지만 인간이 하는 번역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둘 다 틀리지 않더라도요.

AI는 대체로 영어를 기반으로 학습해서 한국어 학습은 굉장히 부족한 상태일 겁니다. 하지만 이후에 한국어 자료를 대량으로 학습하게 되면 굉장히 빨리 좋아질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 단계에서도 저는 번역할 때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의 문장이 나오면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독일어나 이탈리아어를 아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그냥 끌리는 거 있잖아요. ‘할 수 있겠다’는 생각. 거부감 같은 게 전혀 없었습니다. 우연이지만 뭔가 준비가 돼 있었겠지요.”

『안팎』 5호
송태욱과 이야기하는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마음
https://anpakk.kr/conversations/5

  • 안: 김세영, 이주화
  • 팎: 송태욱
  • 글자색: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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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일: 2023년 10월 9일
  •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6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