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과 이야기하는
어떤 여행의 어떤 기술

3호

들어가며

비즈니스의 측면에서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클라이언트가 필요한 일입니다. 콘텐츠 없이, 클라이언트 없이, 나아가 마감 없이 시작한 디자인은 ‘개인 작업’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끝없이 덜컹거리거나 흐지부지 끝나기 십상이죠. 『안팎』 3호에서는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을 통해 기존에 다뤄온 매체를 떠나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콘텐츠 삼아 여행을 디자인하는 여행 크리에이터 ‘꾸준’과 어떤 여행의 어떤 기술, 나아가 오늘날 디자이너로서 살아가는 어떤 방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꾸준

‘느린 여행’을 통해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는 여행 크리에이터. 이베이 코리아(eBay Korea)와 브랜드 컨설턴시인 클레이(Clay)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했다. 2023년 회사를 떠나 ‘씽씽이’로 부르는 무동력 킥보드만으로 일본, 베트남, 타이완을 종주했다. 여기에 더해 ‘후지산 샌들 등정’, ‘미니벨로 국토 종주’, ‘제로포인트트레일 설악 완주’, ‘강화나들길 전구간 트레킹’ 등의 느린 여행을 실천했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유튜브를 통해 여행을 디자인하는 방식을 사람들과 나눈다.

하이퍼링크

꾸준 님, 반갑습니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저희 대화에 어울릴 만한 배경음악이 필요한데요…

저는 듣고 눈물이 찔끔 흐르면 좋은 음악이라 생각합니다. 8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눈물이 찔끔 흐른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를 추천합니다. 어쿠스틱 버전보다는 일렉트릭 버전의 거친 느낌이 특히 제 여행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침묵의 소리」라… 의미심장한 선곡이군요. 여기에 더해 좋아하는 색 두 가지도요. 이미 감지하셨겠지만 이 두 가지 색은 『안팎』에서 저희 대화를 안팎으로 장식할 예정입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색은 약 100일 동안 일본을 여행하면서 애용한 체인 넷 카페 ‘쾌활클럽’(快活CLUB)의 브랜드 컬러인 오렌지색과 검은색입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낯선 도시에 도착하더라도 늘 저를 반겨주는 쾌활클럽의 오렌지색 간판이 안도감과 안정감을 줍니다. 게다가 늘 지갑에 넣고 다니는 오렌지색 멤버십 카드는 칙칙한 배낭여행자인 저를 쾌활하게 만드는 힘도 있고요.

저까지 쾌활해지는 기분입니다. 『안팎』의 사소한 첫 번째 질문이에요. ‘꾸준’으로 활동하기 이전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셨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졸업 후 이베이 코리아(eBay Korea)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이후 브랜드 컨설턴시인 클레이(Clay)에서 여러 브랜딩 프로젝트에 참여했고요. 특히 우아한형제들의 ‘배달의민족’ 브랜드 리뉴얼, 비바리퍼블리카의 ‘토스뱅크’ 브랜드 아이덴티티 및 카드 디자인, 샌드박스스퀘어의 ‘키친마이야르’ 브랜딩 및 디자인, 네이버의 ‘데이터센터 각 세종’ 브랜딩 및 사이니지 디자인 등이 기억에 남아요.

안정적인 월급이 담보된 직장을 그만둔 까닭은?

여행 때문이죠. 물론 크고 작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불필요한 잔가지를 쳐내면 여행만 남는 것 같아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두려움은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길지는 않지만 4년 정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제 미래에 대해 질문하게 되더라고요.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디자이너로서 일하는 방식이 무척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여행과 디자인을 엮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안팎』의 대화 요청을 받고 뭔가 통쾌한 기분이 들었어요. 안그라픽스는 제가 학생 때부터 좋아하는 디자인 에이전시였지만, 제가 여전히 사무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더라면 그냥 멀리서 동경만 했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 같아요.

바로 그 점 때문에 꾸준 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디자이너로서 기존의 방식과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요. 여러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데 참여한 경력을 살려 이번에는 자신을 ‘꾸준’으로 브랜딩했습니다. 산뜻한 동시에 질박한 브랜드명에서 어떤 신념이 엿보이는데요, ‘꾸준’은 어떤 계기로 탄생했나요?

많은 디자이너가 그렇듯 회사 밖에서도 저녁 시간과 주말을 활용해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시도했어요. 하지만 시작할 때 충만했던 열정은 금방 사그라들었고,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흐지부지되곤 했죠. 그런 저 자신을 반면교사 삼아 ‘꾸준’에는 뭐든 꾸준히라도 해보자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렇게 ‘씽씽이’로 부르는 무동력 킥보드만으로 타이완과 베트남을 종주했고, 최근에는 후쿠오카를 시작으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종주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킥보드였나요? 그것도 무동력을?

대학생 때 무동력 킥보드를 타고 통학했어요. 자취방에서 캠퍼스까지 가는 길이 걷기에는 조금 멀고,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가까운 거리였거든요. 처음에는 자전거를 탈까 고민했는데, 제게는 너무 크고 자취방에 세워 둘 곳도 마땅치 않았죠. 자전거도 부담스러울 만큼 기계치이기도 하고요.

네 시간짜리 전공 수업에 들어간 어느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수업이 정말 듣기 싫었어요.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킥보드를 들고 강의실을 몰래 빠져나왔죠. 그리고 킥보드를 타고 학교 근처 강가를 따라 20킬로미터 정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그게 제 킥보드 여행의 시작이라면 시작입니다.

오,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데요? 원래 여행을 좋아했나요?

대학생이 되면 실천하고픈 첫 번째 계획이 세계 여행이었고, 대학 생활 내내 여름 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겨울 방학에는 세계 여행을 다닐 만큼 여행에 진심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그렇게 여행한 나라를 꼽으면 열 손가락이 모자랍니다. 졸업한 뒤에 직장인 생활이 시작됐고,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팬데믹이 몇 년 동안 지속된 탓에 세계 여행은 꿈도 못 꿨죠. 그러다 팬데믹이 끝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바로 여행 계획을 세웠어요. 마침 나이도 스물아홉이었고, 20대의 마지막 1년을 온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여행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누군가에게는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지금까지 9개월 정도 킥보드를 타고 세계 곳곳을 천천히 누비고 있습니다.

이렇게 9개월 동안 세 나라를 꾸준히 여행할 수 있었던 데는 ‘꾸준’이라는 이름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자신을 향한 주문으로서요. 그럼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타이완, 베트남, 일본은 왠지 모르게 늘 끌리는 여행지였습니다. 킥보드로 여행할 때 반드시 필요한 조건도 어느 정도 충족했고요.

하루 평균 이동 거리인 50킬로미터 내에 숙박 시설이 있을 것.
포장된 도로일 것.
치안이 좋을 것.

앞으로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추가될 것 같아요.

남은 여행 기간을 버틸 수 있을 만큼 물가가 비싸지 않을 것.

한 인터뷰에서 여행을 “잠시 현지인이 돼보는 경험”이라 이야기한 적이 있죠. 그 경험이 세 나라에서는 어떻게 작동했나요?

‘와, 이국적이다…’ 여행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마음이 들곤 하죠. 그 마음에 관해 프랑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

여행하는 동안 고향에서 갈망한 걸 얻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요? 신기하고 이국적으로 보이던 거리의 간판, 들꽃, 모래의 색깔 같은 게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몇 달 동안 매일 먹으면 질리고 물리듯 여행 자체가 질리고 물릴 때가 있는 거죠. 그럼에도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까닭은 질림과 물림과 함께 보편적인 여행자의 필터가 벗겨지고,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새로운 필터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필터를 통해 여행지를 한층 더 깊이 바라보게 되고요. 사실 여행에서 완전한 현지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방인보다 현지인에 가까운 필터를 찾을 수 있다면 그 필터를 통해 여행지를 더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바를 나라마다 하나씩 소개해주신다면?

진부하지만 너무나 공감되고, 공감을 넘어 제가 추구하는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듯한 에어비앤비(Airbnb)의 브랜드 슬로건이 있습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그렇기 때문인지 여행이라기보다는 이곳에 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예컨대…

꾸준 님의 여행은 그 자체로 ‘여행을 디자인하는’ 과정이자 방식처럼 보이기도 해요. 어떤 측면에서 디자인은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 규칙을 만들고 따르는 일입니다. 여행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몇 가지 규칙이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요?

그때그때 혼자 만들고, 혼자 따르고, 혼자 수정하는 규칙이다 보니 따로 문서화하지는 못했어요. 다만 그 규칙을 만들고, 따르고, 수정하는 과정의 중심에는 쉽게 수정하지 않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1,500만 원으로 1년 동안의 여행을 무사히 마무리하자.
세상은 좁다. 언제 어디서 이 사람을 또 만날지 모른다.
다음에 또 오면 된다. 지금 모든 걸 경험하려 하지 말자.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능력이다.

하루 6만 원이라는 빠듯한 예산으로 임하는 여행에서 유명 관광지는 입장료가 비싸서 못 들어갈지언정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사는 맥줏값은 아끼지 않습니다. 유명 관광지는 다음에 또 오면 되지만 당장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다시 못 만날 가능성이 크니까요.

나아가 규칙을 배반하는,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는 없었나요?

여행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는 늘 변수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변수를 온전히 변수로 받아들이고자 목적지에 관한 정보도 거의 찾지 않는 편이에요.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는 다른 여행 유튜브 영상도 거의 안 봤고요. 언젠가 갈 곳인데 스포일러를 당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요즘에는 영상을 만드는 데 참고하기 위해 공부 삼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여행은 결국 ‘이동’과 ‘정박’의 반복입니다. 그 사이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어우러질 테고요. 꾸준 님의 여행에서 하루 루틴이 있다면?

이동하는 날에는 숙소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일어납니다. → 해가 질 때까지 킥보드를 타고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죠. →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합니다. → 땀으로 범벅된 몸을 씻고 저녁을 먹습니다. → 그림을 그리거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맥주를 홀짝입니다. → 주로 새벽 1시쯤 잡니다.

정박하는 날에도 일단 숙소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일어납니다. → 동네를 산책하며 정신을 깨우고요. → 식당이 붐비기 전인 오전 11시쯤 아침 겸 점심을 먹습니다. → 카페에서 유튜브에 업로드할 영상을 편집합니다. → 식당이 붐비기 전인 오후 4시쯤 저녁을 먹습니다. → 무작정 걷다가 지칠 무렵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 사 들고 숙소로 향합니다. → 그림을 그리거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맥주를 홀짝입니다 → 주로 새벽 1시쯤 잡니다.

깔끔하고 실용적인 루틴이네요. 그런데 혼자 여행하다 보면 이따금 외로워지기 마련인데, 꾸준 님은 외로움을 어떻게 대하나요? 극복하려 하나요? 그냥 내버려두는 편인가요?

외로움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 때쯤 신기하게도 크고 작은 이벤트가 생깁니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잠시 몰입할 거리가 생기는 거죠. 물론 이따금 정말 외로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맛있는 술과 음식으로 외로움을 달래거나 무작정 밖으로 나가 달리기를 합니다.

한편, 꾸준 님의 여행은 동시에 수행, 나아가 고행처럼 보이기도 해요. 사실 남이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는데요, 일본 여행에서 자신에게 터널 공포증이 있음을 깨달은 것처럼 새롭게 발견한 자신이 있었나요?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 보면 욕구의 우선순위가 명쾌해져요. 경험상 최상위에는 늘 식욕과 수면욕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욕구만 해결해도 하루는 금방 지나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느껴온 잡욕을 해소하고픈 마음이 별로 일지 않아요.

잡욕! 이를테면 뭐가 있을까요?

쇼핑 욕구, 남에게 잘 보이고픈 욕구, 맥북 폴더 정리 욕구, 인스타그램 포스팅 욕구… 너무 많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삶을 꿈꿔온 제게, 가장 마음에 드는 발견은 제가 디지털 유목 생활에 최적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20리터짜리 백팩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든, 심지어 쾌적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샴푸나 바디 워시는 한 달쯤 안 써도 괜찮아요. 베개가 없어도 잘 잡니다. 이불이 없으면 패딩을 입으면 됩니다. 옷은 한 벌만 있어도 됩니다. 수건이 없으면 옷으로 닦으면 되고요. 게다가 맥북 에어와 아이폰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죠.

무동력 킥보드, 어두운 회색 티셔츠, 검은색 샌들이 꾸준 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습니다. 이 물건들은 ‘여행’이라는 디자인 과정에 필요한 주요 프로그램이기도 할 텐데요, 각 프로그램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일단 무동력 킥보드는 자전거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기계치인 제게 딱 맞는 두 바퀴 이동 수단입니다. 어찌나 튼튼한지 4,000킬로미터를 넘게 탔지만 끄떡없습니다. 회색 티셔츠는 넉 달 동안 매일 입고 매일 세탁하지만 묵묵히 견뎌주는 기특한 옷입니다. 물기도 금방 마르고요. 마지막으로 검은색 샌들은 느슨하게 끈을 풀면 슬리퍼, 중간 정도로 조이면 일상용 샌들, 꽉 조이면 달리기까지 가능한 만능 샌들입니다. 벌써 두 켤레째 신고 있는데, 아무래도 ‘인생 샌들’을 찾은 것 같아요.

현재 구독자 4,000여 명 가운데 꾸준 님과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꿈꾸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한 명일 테고요. 그들에게 건넬 만한 유용한 팁이나 주의 사항이 있다면?

제 여행은 넓게는 ‘느린 여행’이고, 좁게는 ‘킥보드 여행’입니다. 특히 ‘느린 여행’은 이 대화를 읽는 모든 분께 추천하고 싶어요. 느린 여행을 통해 천천히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생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리라 믿습니다. 같은 트랙 위에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 아닌 나만의 트랙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거죠. 반드시 해외로 나가거나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당장 오늘 퇴근길에 천천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게 느린 여행의 시작이자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는 과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경험상 킥보드는 안전이 확보된 단거리 여행에 적합합니다. 저는 도시와 도시를 킥보드로 이동하는데, 교통사고뿐 아니라 인적이 뜸한 시골에서는 생각지 못한 야생동물 등 위험 요소가 적지 않거든요. 킥보드는 자전거보다 휴대성이 좋고, 걷는 것보다 빠르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 안에 더 다양한 곳을 둘러볼 수 있죠. 물론 이따금 바퀴가 다 닳아서 교체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바퀴가 자전거처럼 튜브가 아니기 때문에 훨씬 간편하죠.

매주 한두 편씩 영상을 만드는 건 매주 한두 권씩 작은 책을 만드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콘텐츠를 기획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나요? 영상에서 특히 중요하게 전달하려 하는 바가 있다면요?

유튜브를 시작해 영상을 만든 지 이제 넉 달 정도 됐습니다. 처음 석 달 동안은 이렇다 할 기획 없이 무작정 촬영했지만, 요즘은 TV 여행 프로그램 PD로 취업했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그랬더니 영상에 대한 반응이 훨씬 좋아지더라고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죠. 궁극적으로는 제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직접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2인칭 시점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하죠. 콘텐츠를 방해하는 시각 효과나 효과음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고요. 목표가 있다면 영상이 끝나고 ‘어, 벌써 끝났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몰입도가 높은 영상을 만들고 싶어요. 유튜브 영상은 제가 디자인한 브랜드들보다 소비자층이 훨씬 광범위한 만큼 적절한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물론 콘텐츠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지금은 계속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조금 위험할지 모르지만 도파민에 취해 있습니다.

꾸준 님의 영상은 대개 20분을 넘지 않는데요, 영상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영상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이틀에서 사흘 동안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아요. 그렇게 만든 영상은 15분 내외고요. 그렇다 보니 영상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훨씬 많아요.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건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여행자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새벽에 깨서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다른 여행자와 어둑어둑한 주방에서 나누는 대화는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그런 순간만큼은 굳이 영상에 담기보다는 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어요.

영상에서 즐겨 사용하는 글자체도 궁금합니다.

주로 직접 쓴 글씨를 활용하고, 자막에는 글자연구소‘공간체’를 사용합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촬영 장비로 아이폰과 DJI 액션 2가 눈에 띄던데, 각각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나요?

날카로우시네요! 사실 유튜브를 시작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베트남 어느 시골의 모텔에서 낮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나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유일한 촬영 장비인 아이폰으로 시작하게 됐죠.

지금 보면 민망할 만큼 완성도가 낮지만… 올해 한 일 가운데 가장 잘 한 일을 꼽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제게는 의미 있는 영상이에요. DJI 액션 2는 킥보드로 주행하는 장면을 촬영하려고 장만했어요. 한 손에 아이폰을 들고 주행 장면을 촬영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니까요. 그렇게 지금은 메인 카메라로 아이폰을, 서브 카메라로 DJI 액션 2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영상인 만큼 첫 번째다운 야성과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한편, 촬영 장비를 꺼내기 민망한 상황은 없나요? 저도 이따금 유튜브를 해보고 싶은데, 그런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면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사실 매순간 민망합니다. 셀피는 물론이고,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색해서 못 견디는 편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요. 그런데 이렇게나마 몇 달 동안 스스로 ‘카메라 마사지’를 하니 지금은 좀 나아졌어요.

오늘날 디자이너는 대개 스크린에서 1픽셀 단위로 씨름하곤 합니다. 그런 경험 탓에 오히려 영상을 만드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예컨대 0.125초 때문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거나 하는…

“뭣이 중헌디.” 영화 『곡성』의 명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디자이너만 아는 세부에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훨씬 중요한 걸 놓친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늘 되뇌이는 말이기도 하고요. 특히 브랜드 컨설턴시에서 일하는 동안 세상은 정말 넓고, 여행하는 동안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지나치게 세부에 집작하는 건 일과 욕망 사이에서 늘 범하는 실수죠.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었을 것 같은데요?

그전에는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모든 걸 디자인만으로 판단해왔지만, 이제 디자인은 제가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상을 기획하고 만들 때도 마찬가지고요. 디자이너로서의 태도는 최대한 내려놓으려 해요. ‘이 영상을 누가 볼까?’ ‘침대에 누워서 볼까?’ ‘출퇴근길에 지하철에서 볼까?’ 자연스럽게 소비자, 즉 제 영상을 보실 분들의 관점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또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 경험한 유튜브라는 매체의 묘미나 특징이 있다면?

제가 참여해온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는 주로 가이드라인 제작과 전달이었어요. 그 뒤에는 제가 참여한 디자인이 세상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죠. 이따금 디자인이 잘 활용되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긴 했지만 사실 피부로 와닿지는 않았어요. 그냥 막연했죠. 이와 달리 유튜브는 영상을 업로드한 뒤 1초 단위로 피드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묘미라면 묘미입니다. 게다가 제가 시간을 쏟은 만큼 곧바로 성과를 얻을 수 있고요. 학교나 회사에서 다룬 종이 매체와의 가장 큰 차이 같아요.

앞으로 계획은? 나아가 여행 크리에이터이자 디자이너로서 유튜브를 어떻게 활용해볼 수 있을까요?

최종 목표는 여행 관련 브랜드를 운영하는 거예요. 그런 제게 영상을 만들고 유튜브를 운영하는 건 미래를 위한 베타 테스팅이기도 하죠. 특히 유튜브의 익명성에 기대 면전에서 꺼낼 수 없는 말을 댓글로 남기는 분들이 있는데요, 언젠가 브랜드를 운영할 때 마주하게 될지 모를, 하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객을 미리 경험하는 느낌입니다. 더 큰 일을 위한 일종의 예방접종이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정신 훈련’이 필요하신 분께는 직접 유튜브를 운영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그동안 여행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하는 또 다른 여행자나 반딧불이를 좋아하는 민박집 아주머니도 있었죠. 나중에 다시 찾고픈 여행지가 있나요? 또는 조금 더 오래 살아보고픈 곳은요?

제가 들른 모든 곳을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살아보고픈 곳은 베트남의 호찌민이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 2주 정도 지냈음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요. 언젠가는 호찌민에 살면서 그야말로 폭풍같이 경제가 성장하는 베트남을 관찰하고, 기회가 생긴다면 그 시장에 뛰어들어보고 싶어요. 특히 디자인으로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많아 제게는 도전 과제인 동시에 매력적이었습니다.

3개월여의 일본 종주가 끝났습니다. 축하도 축하지만, 다음 여행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떤 규칙이 추가될까요?

이 대화가 『안팎』에 소개될 때쯤 저는 태국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요. 치앙마이, 방콕, 푸켓 같은 관광지를 벗어나 작은 마을들을 구석구석, 그리고 느리게 돌아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열대우림 기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규칙이 몇 개 추가될 것 같아요. 일단 가서 경험해봐야 알 수 있겠죠?

이번에 계획한 태국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가장 하고픈 일이 있다면요? 꾸준 님의 영상이 온라인 출판물이라면, 이는 오프라인 출판물, 즉 종이책으로 치환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자체로 보석 같은 콘텐츠가 될 것 같아요.

지난 9개월 동안 느리게 여행하며 길 위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꼭 실천하고픈 아이디어가 적지 않은데요, 1년짜리 이번 여행이 끝난 뒤에는 하나씩 실천하고 나눠보려 하고요. 1년 동안의 킥보드 여행을 갈무리하는 매체로는 뭐가 적당할지 고민 중이에요. 자연스럽게 종이책부터 떠오르지만, 글쓰기 실력이 형편없는 탓에 망설여집니다.

흔히 일상은 넓게 보면 여행이라고들 하죠. 어쩌면 지금 이 대화도 여행의 일부일지 모르고요. 일상이라는 여행과 타지에서 임하는 여행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행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자 기회라고 생각해요. 일상이라는 크고 강력한 자석의 자력이 닿는 범위에서 살짝 멀어지는 게 일상에서의 여행이었다면, 장기 여행은 일상의 자력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특정 궤도에 진입하지 않고 유영하며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요.

『안팎』은 “이미 답이 정해진 길을 누구보다 빠르게 소개하기보다 정답 없는 세계의 안팎을 두루 살피며 여러분의 방황을 도울 예정입니다.” 앞으로 꾸준 님의 방황은 어떤 모습일까요?

매 순간 고민하고 방황하겠지만, 나중에 돌아봤을 때 ‘음… 잘했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방황하고 싶어요.

“천천히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자신만의 트랙과 속도를 찾게 됩니다. 이는 생활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리라 믿습니다. 같은 트랙 위에서 남과 경쟁하는 게 아닌 나만의 트랙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거죠.”

『안팎』 3호
꾸준과 이야기하는 어떤 여행의 어떤 기술
https://anpakk.kr/conversations/3

  • 안: 민구홍
  • 팎: 꾸준
  • 글자색: black
  • 배경색: orange
  • 발행일: 2023년 9월 18일
  •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20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