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종과 이야기하는
관찰의 가공법

4호

들어가며

서점에서 미술 관련 서적을 살피다 보면 ‘관찰과 표현’이라는 문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누군가에겐 너무 익숙해서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는 단어도 아니죠. 그런데 정말, ‘관찰’과 ‘표현’이란 무엇일까요? 일본의 현대미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그의 저서 『사각형의 역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은 머리의 입구라서 사물도 풍경도 모두 통과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눈으로 통과한 것을 머리가 포착한다는 뜻이다. 즉,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볼 수 있다” 관찰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표현은 관찰의 자연스러운 결과겠지요.

『안팎』 4호에서는 주의 깊은 관찰자이자 일상의 산책자이며 길종상가 내 가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박길종과 함께 ‘관찰을 가공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박길종

길종상가가공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때때로 박가공이라고도 불린다(혹은 스스로 부른다). 2010년 길종상가라는 이름을 지은 이후 약 12년간 가구, 공간, 조명 등 디자인과 ‘가공’이 필요한 물건들을 제작해 왔으며 전시, 예술, 공간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하 구구절절한 설명과 의미 없는 약력 소개를 지양하는 그를 본받아 자세한 설명은 길종상가 웹사이트에 있는 짤막한 소개 글로 갈음한다. “길종상가는 상가에 입점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느끼고 겪어온 모든 것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인력, 그 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적절한 금액을 받아 지속적으로 운영합니다.”

하이퍼링크

반갑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저희 대화에 어울릴 배경음악으로는 뭐가 좋을까요?

도어스(The Doors)의 「The Spy」란 곡을 골랐습니다. 1970년도에 나온 곡인데, 제가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고 『안팎』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팀 이름 자체가 ‘문’인데 안과 밖을 오간다는 철학적인 면도 비슷하고요. 가사는 대략 이렇습니다.

“I’m a spy, in the house of love. I know the dream that you’re dreamin’ of. I know the word that you long to hear. I know your deepest secret fear.”

“나는 스파이, 사랑의 집에 있지. 당신이 꾸는 꿈을 알지.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알지. 당신의 깊은 곳에 숨겨진 두려움을 알지.”

아, 혹시 저희가 스파이인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웃음) 길종상가에 방문하신 것도 그렇고 반복되는 가사와 지금 이 인터뷰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저희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알아가는 중이기도 하고요.

하하, 재밌네요. 그러면 스파이로서 첫 질문을 해볼게요. 사실 이번 대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길종상가의 ‘카테고리’를 정하기 어려웠어요. 필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요. 길종 님은 주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나요?

그냥 ‘길종상가의 박길종입니다.’라고 소개하곤 해요.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물으면 ’이것저것 한다’고 대답하고요. 작업 분야가 넓은 편이라 미술 계열 작업인지 공간 디자인 작업인지 혹은 그 외 작업인지에 따라 관련 프로젝트들을 보여주며 그때그때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분들 역시 저에게 요구하는 작업의 방향이 다 다르기도 하고요.

길종 님은 혹시 평소에 거두절미하시는 편인가요? 지난 8월 시청각 랩(AVP lab)에서 진행한 개인전 『여름 그늘, 휴거』 전시 리플릿에도 일반적인 작가 소개 글은 보이지 않아요.

전시 서문은 시청각 랩의 큐레이터 현시원 님이 써주셨어요. 보통은 리플릿에 작가 소개를 본인이 직접 쓰거나 혹은 ‘몇 년도 출생, 어느 대학 졸업, 어떤 전공, 어디 어디에서 전시를 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 들어가잖아요. 근데 저는 ‘굳이 써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미 없다고 느끼거든요. 리플릿에 들어가는 작품 설명도 사실 내부 공유용으로 간단하게 쓴 거였는데 ‘이거 좋다, 재밌다’는 반응이어서 결국 드로잉과 함께 들어갔죠. 전시 서문에는 제 글이 “하이쿠 같다”라는 표현도 있어요. 평소에도 긴 설명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여름 그늘, 휴거』 기획: 현시원, 그래픽 디자인: 신신

“봄에서 여름으로 걸어가는 농담 같은 전시”라는 소개 문구가 그대로 어울렸어요. 전시를 하게 된 계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전에 현시원 큐레이터님이 기획한 다른 여러 전시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개인전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오갔어요. 매번 타이밍이 안 맞아서 보류하다가 올해 초에 한 번 더 제안해 주셨는데 마침 시기가 잘 들어맞아 ‘그럼 이번 여름에 해보자’고 한 거죠. 전시는 말 그대로 제가 봄에서 여름으로 걸어가면서, 산책하거나 출장 중에 돌아다니면서 봤던 것, 경험했던 것, 느꼈던 것 들을 총망라한 거예요.

박길종, 「야호」

작업 과정도 재밌었을 것 같아요. 누군가가 의뢰해서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어떠셨어요?

사실 구상 단계에서는 전시한 것보다 더 많은 작품이 있었어요. 그중에 ‘이렇게 하면 맥락과 동선이 딱 풀리겠다’라고 이미지가 그려지는 1번부터 10번까지의 작품을 정한 거죠. 봄에서 느끼는 감정과 여름의 감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은 제가 느낀 것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것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고 정리하는 일이 즐거웠던 것 같아요. 한편, 찾아오신 분들의 분야가 굉장히 다양했다는 점도 이번 전시의 재밌는 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픽, 산업 디자인, 인테리어, 공간 디자인, 가구 제작하시는 분, 목수 등 정말 분야를 막론했어요. 전시에서 좋아하시는 포인트도 다 달랐는데 주로 물건을 제작하는 분들은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여기저기 살펴보고 만져도 보고, 반대로 예술계 종사자분들은 작품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를 궁금해했죠. 디자인 계열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또 관점이 달랐어요. 전시를 이해하는 제각기 다른 시선들이 저는 되게 재밌더라고요.

『여름 그늘, 휴거』의 작품 배치도

전시장 입구의 「팔방풍」이 관람객을 구원했어요. 올해 8월은 유독 더웠고, 오르막길을 오른 터라 힘들었거든요. 입구에 들어서자 길종 님이 직접 선풍기도 틀어주시고 간단한 안내도 해주셨지요.

시청각 랩으로 가는 언덕길이 한 100미터 가까이 되거든요.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시면 입구에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가시라고 안내했어요. 차례로 들어오셔서 「전시 보행기」도 타보고 작품도 만져보고 리플릿에 적힌 작품 설명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그런 장면들을 보는 게 굉장히 좋았어요.

「팔방풍」 작품 설명
여름에 전시를 보기 위해 언덕을 올라온 더운 관객들이 입구에서 8개의 선풍기로 에어 샤워를 하고 땀을 식히고 들어와 그늘 같은 전시장에서 쾌적하게 전시를 둘러본다.

「전시 보행기」 작품 설명
충무로를 지나는데 할머니가 유모차를 개조해 폐지를 싣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이 유모차에는 할머니 본인을 포함, 모두를 위한 큰 시계가 밖으로 보이게 달려 있었다. 전시장에서도 전시를 보다가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시계가 달려 있고, 보다가 덥지 않게 선풍기도 있고, 무거운 가방을 손잡이에 걸고, 이 작품의 제목은 뭔지 바로 확인하면서 보다가 힘들면 기대기도 하는 전시 관람을 도와주는 전시 보행기.

박길종의 ‘가공’에는 어딘지 농담 같은 유머가 늘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길종 님은 유머 있는 사람인가요?

누굴 웃기거나 말을 재밌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낯을 가리기도 하고 농담도 잘 안 하고요. 그래서 오히려 작품에서 재미있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에서는 유독 박길종의 ‘관찰자 시점’이 잘 느껴졌어요. 평소에 관찰하는 것을 즐기시는 편인가요?

산책을 할 때도 그렇고 출장을 가도 그렇고, 굉장히 두리번거리는 편이에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저 건물 끝에 뭐가 달려 있네. 뭐지?’ 이런 식이죠.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걸 워낙 좋아해요. 오래된 주택의 벽이나 지붕에 주인이 직접 무언갈 덧대고 수리한 흔적들도 재밌고, 주차장 팻말이나 고깔도 되게 다양하잖아요. 그런 대상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두죠. 길종상가 초기에는 웹사이트의 ‘걷다 사진관’ 폴더에 그 기록을 아카이빙 해두기도 했어요. 지금은 박가공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는 정도로 변화했고요.

관찰을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주로 어떤 도구를 사용하세요? 손으로 직접 그리는 걸 선호하나요?

기록은 주로 휴대폰 메모장에 해요. 사진을 찍고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장에 계속 써 내려가죠. 이번 전시는 봄, 여름에 수집한 기록을 가지고 A4 용지에다가 ‘대충 이런 느낌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그려보면서 구상했어요. 리플릿에 들어가 있는 드로잉도 모두 구상할 때 그린 그림이에요.

앗, 작품이랑 똑같아 보이던데요? 모두 완성한 후에 그저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신 줄 알았어요.

완성작이랑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흡사해요. 물론 여러 번의 아이디어 스케치가 있긴 했지만요. 작품 설명 또한 스케치할 때 옆에 간단하게 적어두었던 건데 리플릿에 모두 반영되었어요. 신의 한 수였죠. 작품 설명에 대한 반응이 예상보다 더 좋았거든요. (웃음)

「여름 그늘」 작품 설명
여름에 산책을 하다 보면 하수구 뚜껑인 그레이팅 사이로 식물이 빼꼼 머리를 내민 모습이 보인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레이팅 그늘 아래에서 ‘나 여기 있어’라고 손짓하는 식물을 보면, 해변가 파라솔 그늘 아래 썬베드에 누워 있는 사람과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야호」 작품 설명
산에 올라가면서 라디오를 듣고 ‘야호’를 외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구상. 손과 발, 산과 등산 모자를 쓴 형태의 판, 겉은 나무색이지만 속은 초록색.

기록이라면 길종상가 웹사이트를 빼놓을 수 없어요. 웹사이트의 내용은 고객이나 협업자에겐 상거래를 위한 중요한 정보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박길종의 성실한 개인적 기록인 것 같기도 하죠.

길종상가 홈페이지는 쉬우면서도 어렵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사실 웹사이트의 기능이라는 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잖아요. 일기처럼 기록을 하기도 하지만요. 저는 웹사이트를 주로 포트폴리오 용도로 사용해요. 이 일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모든 결과물을 카테고리별로 만들어서 보여줄 수는 없거든요. 프로젝트 분야도 다양하고 내용도 방대하고요. 그래서 미팅할 때 사이트에 있는 프로젝트들을 적재적소에 열어서 보여줘요. 그러면 서로 이해가 훨씬 빠르죠. 의뢰하는 분들에게 길종상가 사이트에서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는지 링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요.

길종상가가 쌓아온 기록은 각각 1주년과 10주년에 책으로 남기도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매년 만들까 생각했는데, 책 만드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럼 5년에 한 번 내야겠다’ 했는데 서로서로 다 바쁘니까 그냥 지나가고⋯ 해서 거의 11년치 분량을 모아서 만든 것 같아요. 2011년도에 한 번, 2021년도에 한 번씩 냈으니 다음은 2031년이 되겠네요.

2021년도 책의 경우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각각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도요. 두 책은 무엇이 다르고, 어떤 점에서 연결될까요?

『사포도』는 말하자면 이야기 모음집이에요. 일곱 명의 필진이 길종상가를 둘러싼 이야기를 글로 써주셨고, 저는 그걸 보고 떠오르는 걸 삽화로 그렸죠. 안에는 책갈피의 역할을 하는 전단지도 있는데, 거기에 쓰인 두 개의 번호가 각각의 책과 연결돼요. 해당 작업물이 있는 페이지 번호인 거죠. 두 권의 책은 책갈피와 주석 등의 장치로 유연하게 연결돼 있어요.

재밌네요. 그럼 2031년에는 어떤 책을 만들고 싶으세요?

글쎄요.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요. 2011년도의 책과 2021년도 책은 포맷의 차이가 꽤 크거든요. 전자는 길종상가가 처음 등장한 후 1년간의 결과물을 담는 데 충실했다면, 후자의 경우 그간의 기록은 모두 웹사이트에 있으니 그걸 시간순으로 다시 나열하는 건 큰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디자인 스튜디오 신신 그리고 편집과 기획을 하신 이미지 님에게 모두 맡겼죠. 저는 별로 관여한 게 없어요. 책의 챕터에 따라 종이 질감도 다르게 하고, 작업에 따라 사진을 일부분만 잘라서 보여주거나 전체를 보여주거나 하는 부분도 다 신신과 이미지 님이 알아서 해주신 거죠. 특히 사진은 10년치 분량이라 디테일과 화질이 제각기였어요. 개중에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나 직접 그린 드로잉도 있었고요. 그래서 자세히 보면 사진 위로 망점 같은 걸 깔아주셨어요. 이미지 톤을 일정하게 보여주기 위해 신신에서 의도하신 거죠. 후가공이나 책갈피의 디테일도 다 잘 살려주셨어요.

스튜디오 신신과 길종상가는 영혼의 단짝일까요? 디자이너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져요.

아, 신신은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에요. 2009년도쯤 홍대에 ‘두리반’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 일대를 재개발하면서 강제집행당하고 철거당하고⋯ 하는 그런 상황이 있었어요. 지금은 엄청 큰 빌딩이 들어섰지만 원래 그 주변은 다 낮은 주택과 오래된 상점 들이 있던 곳이거든요. 당시 재개발에 평화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음악 페스티벌이 열렸죠. 저는 그 공간에 2011년도 무대 디자인과 집기를 제작했고 신신은 그래픽으로 참여했어요. 당시 기획자였던 박다함 님 소개로 처음 만났죠. 인사를 나누는데 마침 그래픽을 하신다고 해서 길종상가의 로고를 의뢰했어요. 신신은 사무실에 가구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저에게 의뢰하셨고요. 서로서로 계속 의뢰하다 보니까 10년 넘게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어쩐지 뭉클해지는 이야기네요. 한편 『길종상가 2021』 표지 사진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표지에 후가공으로 들어간 선은 조감도인가요?

네, 맞아요. 제가 2010년도, 2011년도에 그렸던 「조감도 시리즈」예요. 표지 사진은 작업실은 아니고, 2012년도쯤에 열었던 길종상가의 오프라인 상점입니다. 당시 용산 우사단로 끝자락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프라인 상점에서는 저희가 만든 물건을 팔기도 하고 행사나 팝업을 기획해서 열기도 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작업실은 원래 대학 졸업할 때쯤엔 당고개역 부근에 있었다가 ‘서울의 중심으로 가보자’ 해서 용산으로 갔어요. 그러다 길종상가를 만들었고, 활동하다 보니 더 큰 작업실이 필요해서 을지로로 오게 됐습니다.

길종상가, 「조감도 시리즈」

길종상가의 ‘처음’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요. 첫 시작, 첫 프로젝트 같은 것들 말이에요.

2010년도 하반기에 ‘길종상가’라는 이름을 만들었어요. 제가 낙원상가나 세운상가 같은 상가 유형을 좋아하거든요. 상가 안에는 여러 상점이 있고, 그 상점들은 유지될 수도 있고 누군가가 새로 들어오고 나가면서 계속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제가 하는 일도 바뀔 수 있고 또 잘 안되면 업종을 바꾸자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제 이름을 앞에 걸면 사람들이 믿고 맡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왜, 종종 식당에 사장님의 이름과 사진을 걸기도 하잖아요. 지금은 길종상가에 입점한 상점 ‘가공소’를 운영하고 있어요. 원래 이름은 ‘목공소’였는데 그러면 나무로 된 작업만 할 것 같아서 좀 더 많은 영역의 작업을 포괄할 수 있도록 ‘가공소’라고 바꿨어요.

‘가공’이라는 단어가 딱 적합한 것 같아요. 을지로에도 여기저기 가공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더라고요.

‘가공의 인물이다’라는 말도 하잖아요. 물건을 ‘가공하다’의 가공도 있고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어요. 제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박가공’으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에게 저를 소개할 때 “길종상가의 박길종입니다”라고 하려니까 좀 부끄러웠거든요. 박가공으로 바꾼 후로는 가끔 농담도 해요. “박길종 대표님은 사무실에 계시고 제가 대신 나와서 작업하고 있어요”라고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도 일부러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하하, 길종 님은 유머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동심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요. 어릴 때도 관찰하는 걸 즐겨 하셨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만화책을 보더라도 그림이나 텍스트, 펜 선 같은 걸 하나하나 보는 편이었죠. 그래서 만화책 읽는 속도가 느렸어요. 친구가 1권 보고 있고 제가 2권을 보고 있으면 늘 친구가 닦달했죠. 아직도 보고 있냐고요. 어릴 때는 만화가가 꿈이었던 적도 있어요.

좋아하는 만화책을 한 권만 뽑아본다면?

아⋯ 하나만 고르기는 너무 어려워요.

그럼 가장 최근에 읽은 만화책은요?

(침묵이 흐르고⋯) 아, 최근에 구입한 만화책이 있어요. 『루브르의 고양이』(문학동네, 2022)라는 책인데 『철콘 근크리트』 『핑퐁』으로 유명한 일본의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린 거예요. 고등학생 때 『핑퐁』이라는 만화를 되게 재밌게 봤거든요. 이 작가의 만화들은 연출이나 스토리가 좋고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이나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대체로 시니컬하면서도 따듯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사람이죠.

지금 모습 그대로 만화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그러면 어릴 때는 만화가를 꿈꿨고,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지금은 가공하는 일을 하고 계신 거네요.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는데 그때는 회사에 가거나 취직한다는 게 아예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거의 90% 이상은 회사를 안 가더라도 개인 작업을 해서 먹고살든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를 하든 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죠. 회사를 가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일단 작업은 계속하고 싶고. 그래서 알바를 꾸준히 했는데 그나마도 대학 졸업하고 1–2년 정도 지나니까 애매해졌어요. 나이는 계속 차고요. 당시에 시급이 3500원인가 그랬는데 시급이 높은 데를 찾다 보니까 목공소에서 잡일, 정리 이런 일을 하는 데 5000원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일반적인 목공소는 아니었고 판매도 하고 아카데미도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돈을 많이 준다고 하니 일단 가서 해보자 생각했죠. 미술 전공이니 손재주는 자신 있었어요.

공구는 원래 잘 다루셨나요?

아니요. 안 해봤죠. 안 해봤는데, 그래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1년 정도 빡세게 일을 했어요. 사장님이 일을 되게 많이 주셨는데, 많이 시키기만 한 게 아니라 재미있는 여러 영역의 일을 다방면으로 주셨어요. “미술 전공했으니까 칠도 해봐” “벽화도 그려봐” 이런 식으로요. 그때 사포질이나 코팅, 칠 등 기술적인 부분과 여러 가지 일을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이 일을 하면서도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대학생들이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 자신의 전공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랬고요. 근데 막상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어보면 사회에서는 그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일단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저는 목공소에서 일하면서 ‘여기서 배운 기술과 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응용해 볼까’ 계속 고민했어요. 그런 고민 끝에 길종상가가 나온 것 같아요.

길종상가 간판 달기(2012)

길종상가를 시작하고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잘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있었을까요?

제 성격이 그런 건지 압박감이나 부담감은 별로 없었어요. ‘날 믿고 돈도 주고 했으니 성심성의껏 최대한 잘 해보자’라는 생각이었죠. 그때는 공구나 제작 도구도 별로 없었는데 그걸 가지고 아침부터 밤 9시, 10시까지 열과 성을 다해 혼자 작업했어요.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도구와 저랑 작업물만 있는 거죠.

다른 인터뷰 중에 “아침 9시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6시에 끝내는 루틴을 만들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루틴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네, 그걸 지킨지는 이미 꽤 오래됐어요. 처음에는 시간도 중구난방으로, 주말도 없이 일하곤 했는데 저를 포함해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 클라이언트까지 모두의 만족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쉬고 있어요. 회사 다니는 분들에게는 기본이겠지만, 프리랜서들은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일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근데 막상 해보니까 모두들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흔히 말하는 워라밸 때문일까 생각했어요. 길종 님은 일과 자아를 잘 분리하는 편인가요?

딱히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자연스럽게 그냥 내버려 두죠. 가끔 어떤 사람들은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데, 사실 영감이라는 게 어디서 갑자기 툭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늘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샤워하는데 ‘아, 맞다. 그건 이렇게 하면 좋겠다’ 하고 문득 떠오르는 거죠. 혹은 영화를 보다가 어떤 장면에서 ‘어, 저 소품 예쁜데 다른 식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하며 아이디어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저는 일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늘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의뢰받은 작업을 하면서 스트레스 받지는 않나요? 클라이언트가 있는 작업에서는 종종 자기 자신과의 적당한 타협을 필요로 하잖아요.

스트레스 받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보통 프로젝트는 예산과 일정이 타이트한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면 최대한 예산을 맞추되 일정도 맞출 수 있는 방향으로 디자인 시안과 제작 방식을 정하긴 하죠. 그걸 기본값으로 하고, 구조나 컬러를 변경하는 등의 부분에서 주로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성북동에 위치한 「공간 뒷동산」은 ‘하고 싶은 게 분명한 작업자’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클라이언트의 환상의 콜라보였다고 생각해요.

‘뒷동산’은 쌀술을 빚는 양조장이자 음식과 음악이 있는 공간이에요. 사장님은 제 친구고 길종상가의 멤버기도 했고요. 테이블부터 공간, 천장과 바닥, 심지어는 화장실의 휴지 걸이, 티슈 케이스까지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까 저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한 땀 한 땀 만들었어요.

뒷동산이라는 이름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이 주를 이루는데 술에 만취해서 어지러울 때 주변이 울렁울렁하게 보이는 걸 표현한 것이기도 해요. 40밀리미터 정도의 얇은 목재 루바가 아마 몇 천 개 쓰였을 거예요. 얇고 촘촘하게 이어 붙였죠. 공사하면서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했는데 이런 꼬불꼬불한 디자인을 한 번에 쿨하게 받아준 흔치 않은 의뢰인이기도 합니다.

덩달아 취하는 기분이네요. 그러면 그간의 작업 중 하나만을 꼽아 소개한다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늘 최근 작업을 소개하는 편이에요. 그간의 시간 끝에 나온 가장 가까운 작업물이니까요. 최근에 한 작업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LP바 「근정전」의 공간 디자인인데, 사장님은 제가 좋아하는 동생이자 길종상가에서 잠시 일했던 동료기도 하죠.

제가 디자인을 맡고 시공은 그 친구가 직접 맡아서 했어요. 큰 바탕은 목수분들이 해주시고 이후 마감은 직접 4개월가량 현장 시공했는데, 제가 디자인한 것들을 어떤 시공 업체보다도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노력해 줘서 감동이었습니다.

LP 바 「근정전」

오, 꼭 연극 무대 같아요.

공간 전체의 형태들은 LP와 관련이 많아요. 레코드판의 원형을 무대로 삼고 커버에서 꺼내는 모습에 착안해서 반원 형태의 책상과 선반을 만드는 그런 컨셉이죠. 정사각형의 LP 재킷이 반복되는 것처럼 천장과 바닥 타일 카펫, 테이블에서도 사각형의 형태가 반복돼요. 심지어는 간판도요. 또 벽면에 있는 구불구불한 선은 레코드판 표면의 소리 골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얇은 선을 표현한 거예요.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파장의 모양이 불규칙한데, 그걸 확대해서 패턴으로 활용했어요.

모티브가 된 형태가 규칙적이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일관적으로 적용되어 있네요.

공간 디자인은 현장에서 얼마나 디테일하고 꼼꼼하게 반영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공간을 운영하는 친구가 제가 만든 디자인을 정말 잘 이해해 줬고, 그걸 또 공간에 잘 실현하려고 노력했죠. 일반 시공사였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에이, 이걸 어떻게 해요? 단가가 안 맞아요. 이런 디테일을 우리더러 하라는 말이에요?’ 이러시면 저도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안 맞으면 바꿔야죠, 뭐.’ 이렇게 됐겠죠.

길종상가의 초기 작업과 최근 작업을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르다고 느끼세요?

크게 다른 건 없는 것 같은데 스타일은 바뀌었을 수도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초기에 사선을 많이 사용하고 컬러나 디자인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 시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재료, 컬러, 구성 요소 들을 좀 더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단순히 보기 좋으니까 곡선으로 만들거나 사선을 쓰는 게 아니라 의미를 적절하게 담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달라진 것 같아요. 앞서 말한 「근정전」에서 LP의 요소를 어떻게 의미 있게 담을지, 색감은 어떻게 연결시킬지 고민했던 것처럼요.

혹시 좋아하는 디자이너나 작업자가 있나요?

사실 딱히 없어요. 서양화 전공이라 가구 디자이너나 공간 디자이너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요. 왜, 유명한 디자이너의 계보나 이론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찾아보는 타입은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다가 ‘저거 되게 괜찮아 보인다’ 해서 찾아보면 ‘아, 그 사람이구나. 많이 들어본 이름이네’ 하긴 하죠. 근데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렇진 않아요. 그냥 한 명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편이에요. 각 잡고 앉아서 공부하려면 어렵고 재미없잖아요. 근데 흥미가 생겨서 갑자기 찾아보게 되면 그건 또 재밌거든요. 그런 식인 것 같아요.

작업 대상이 서양화라는 평면에서 사물이라는 입체 형태의 작업으로 바뀌었잖아요. 입체 작업의 남다른 쾌감이 있을까요?

쾌감이라기보다 입체로 만들면서 좋았던 점은 있어요. 평면은 아무래도 벽에 걸면 사람들이 관람만 하고 유명 작가가 아닌 이상 구매도 잘 안 하죠. 그저 보기만 하고 아니면 마는 식인데, 제가 만드는 것들은 실제로 누군가가 앉고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형돼요. 책장이라면 그 안에 들어가는 물건에 따라 인상이 계속 바뀌기도 하고, 의자 용도로 만든 것이 화분 받침이 되기도 하고요. 제가 만든 걸 어떻게 쓰는지는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인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이 재밌는 것 같아요.

2010년도에 시작해 12년가량의 시간이 지났네요. 길종상가에서 가공소까지, 변화가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2023년의 길종상가는 어떤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미래를 계획하는 편은 아니에요. 처음 시작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렇게 될 줄 몰랐거든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길종상가’라는 이름을 짓고 가볍게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까 의뢰가 들어오고 일의 영역도 더 확장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하는 일을 잘 수행하고, 또 결과물을 충실하게 만들어내면 자연스럽게 그다음 일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좋아하는 재료나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재료가 따로 있으신가요?

요즘은 딱히 없어요. 한 가지 재료를 끝까지 파고 탐구하는 디자이너도 있지만 저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재료가 매번 새로울 수는 없고 그보다는 디자인과 재료, 아이디어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구성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지난 8월 말 하늘에 슈퍼 블루문이 떴어요. 소원을 비셨나요?

네, 아내와 강아지랑 산책하면서 봤어요. 아내가 곧 운전을 시작할 텐데 거의 장롱면허거든요. 그래서 아내가 운전을 안전하게 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다정한 소원이네요.

아, 저의 안전도 달려 있으니까요⋯.

대학생 때부터 사용한 캐비닛과 당시 붙여놓은 이미지들

“사실 영감이라는 게 어디서 갑자기 툭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늘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거죠. 저는 일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늘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안팎』 4호
박길종과 이야기하는 관찰의 가공법
https://anpakk.kr/conversations/4

  • 안: 김하영, 박푸름, 이주화
  • 팎: 박길종
  • 글자색: lemonchiffon
  • 배경색: darkgreen
  • 발행일: 2023년 9월 25일
  • 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4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