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럴 슐스트와 이야기하는
처음

8호

들어가며

“처음이란 항상 존재한다. 모든 게 새롭고,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순간만이 진정한 마법과 기적을 선사한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쓴 미국의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의 말입니다. 처음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저 처음인 까닭에 누구에게나 특별합니다. 처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동시에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티켓을 약속합니다. 이따금 처음이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처음이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만들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만큼은 분명하죠.

『안팎』 8호에서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디자이너 로럴 슐스트(Laurel Schwulst)와 그의 수많은 ‘처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로럴 슐스트

1988년에 태어난 로럴 슐스트(Laurel Schwulst)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예술가, 디자이너, 작가,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비롯해 ‘체험적 세계로서의 프로젝트’, ‘확장된 글쓰기’ 등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워크숍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크리에이티브 인디펜던트』(The Creative Independent, TCI),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등 여러 매체에 게재된 그의 작품은 에세이, 향수 리뷰, 인터뷰 등의 형태를 취한다.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등에서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가르치며 BBC 라디오 4, RISD, 서울시립대학교, 구글, 위키백과 등 문화, 학술, 인터넷 관련 기관에서 강연했다. 2023년 현재 그는 자신의 공공 두뇌를 호스팅하는 네트워크 큐레이션 플랫폼인 아레나(Are.na)의 기프트샵 디렉터이자 점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인터넷의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를 위해 노력한다.

하이퍼링크

반갑습니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 대화를 보조할 만한 배경음악이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질문이군요. 스즈키 요시오(鈴木良雄)의 『모닝 픽처』(Morning Picture)는 어떤가요? 저희 부모님이 결혼한 해인 1984년에 발표된 앨범으로, 유쾌한 동시에 무척 신비로운 작품입니다. 앞면에는 창밖을 바라보는 추상적인 우주 이미지가 있고, 뒷면에는 1980년대 뉴욕의 햇살을 받으며 미소 짓는 스즈키 요시오의 모습이 담겨 있죠.

특히 좋아하는 색 두 가지도요. 이미 감지하셨겠지만, 두 가지 색은 『안팎』에서 우리 대화를 장식할 예정입니다.

이 앨범에서 영감을 받은 진한 파란색(darkblue)과 밝은 노란색(lemonchiffon)은 어떨까요?

좋습니다. 첫 번째 공식 질문입니다. 당신은 1988년에 태어나 또래보다 조금 일찍 컴퓨터와 월드 와이드 웹을 접했습니다. 가정 환경 때문이나요? 아니면 우연이었나요?

저는 1988년에 태어났어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의 ‘노멀’(Normal)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죠. 옥수수밭이 넓게 펼쳐진 단순한 곳이에요. 집 근처에는 숲이 있었고요. 사실 좀 지루한 곳이어서 호기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은 보험 회사에서 일하셨는데, 제가 관심 있는 건 무엇이든 탐구해보라고 격려해주셨죠.

저는 제가 태어난 해인 1988년에 관해 조사하는 걸 좋아해요. 1988년에는 서울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열리고, 최장 수중 해저 터널이 개통되고,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마지막 강연인 『다음 천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Six Memos for the Next Millennium)가 출간됐죠.

“인류가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꿈속이나 비이성적인 세계로 도피하자는 뜻이 아니다. 접근 방식을 바꾸고 다른 관점, 다른 논리, 새로운 인식 및 검증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벼움의 이미지가 현재와 미래의 현실에 의해 꿈처럼 사라져서는 안 된다.” (『다음 천년을 위한 여섯 가지 메모』에서 ‘가벼움’에 관해)

제가 태어난 1985년에 관해서도 조사해보고 싶네요. 제가 처음 접한 컴퓨터는 매킨토시 LC였는데, 혹시 처음 사용한 컴퓨터를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운영체제는 윈도우였고, 인터넷도 없었죠. 그때 저는 「트레저 마운틴」(Treasure Mountain)이라는 게임에 빠져 있었어요. 기초적인 읽기, 수학, 논리 문제를 풀고 보물을 찾으면서 산 정상에 오르는 게임이죠. 처음에는 글을 읽는 법을 전혀 몰랐던 터라 옆에서 부모님이 도와주셨는데, 그 시간을 줄이려고 자연스럽게 글을 읽는 법을 배웠어요. 게임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뎠을 거예요.

처음 만든 웹사이트는요?

‘호스 랜드’(Horse Land)라는 웹사이트에서 처음 HTML을 익혔어요. 호스 랜드는 제가 만든 웹사이트는 아니지만, 웹사이트에는 나만의 말을 키우는 마구간 같은 공간이 있었어요. 여기서 HTML을 통해 제 말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었죠.

어떤 용도였나요? 어떻게 만들었나요?

이따금 웹은 아름다운 꿈 같아요. 분위기와 이미지는 어렴풋한데 무엇을 위했던 건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웹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마침 호스 랜드에서 HTML도 익혔고요.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운영한 웹사이트인 『내 모든 친구를 한번에』(All My Friends at Once)에 게시한 에세이에서 말을 향한 애정을 통해 온라인에서 성장한 이야기를 썼어요.

2018년에 발표한 글에서 당신은 웹사이트를 “지식의 강을 따라 흐르는 집”으로 규정했죠. 이 생각은 어디서 나왔고, 지식의 강은 어디로 흐르며, 그 집에는 누가 살고 있나요?

“지식의 강을 따라 흐르는 집”은 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만든 『크레에이티브 인디펜던트』(The Creative Independent, TCI)입니다. 이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떠올린 생각이죠.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 창작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웹사이트가 그 자체로 또 다른 예술가로서 계속 학습하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진화할 수 없을까? 매일 웹사이트에 소개되는 대화를 통해 알게 되는 새로운 지식이 웹사이트를 계속 변화시킬 수 없을까? 이 웹사이트는 지식을 연구하는 실험실이고, 그 건축가는 지식인 셈이죠.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데 영감을 준 작품이 두 점 있어요. 하나는 줄리아 카메론(Julia Cameron)의 『예술가의 길』(The Artists’s Way)입니다. 창작과 관련한 자기 계발서인데, 이 책에서 그는 예술가의 길을 원형 또는 나선형으로 설명해요. 왜 하필 나선형일까요? 나선형은 시간이 지나면서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고, 이는 모든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죠. “매번 다른 단계에서 몇 가지 문제가 돌고 돕니다. 예술가의 삶에서 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단계에는 좌절과 보상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길을 찾는 것, 그리고 발판을 마련해 등반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만든 『크레에이티브 인디펜던트』(The Creative Independent, TCI)

자연스럽게 이토 준지(伊藤潤二)나 스즈키 고지(鈴木光司), 루이스 브루주아(Louise Bourgeois)가 떠오르네요. 다른 하나는요?

프랑스의 시인 프란시스 퐁주(Francis Ponge)의 달팽이에 관한 시입니다. 그는 달팽이 껍질을 ‘달팽이를 이루는 본질의 일부’인 동시에 ‘달팽이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예술 작품이자 기념비’로 묘사했죠. 달팽이와 예술가들은 다른 게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로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달팽이의 점액을 연구하는 까닭이죠.

두 작품과 관련해 제가 킥스타터(Kickstarter)에서 진행한 강연을 편집한 이 을 참고해보시면 좋겠어요.

당신은 지금까지 몇몇 회사를 경험했습니다. 졸업 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링크트 바이 에어(Linked By Air)에서 일했죠. 링크트 바이 에어는 저를 비롯해 누군가에게는 ‘꿈의 회사’이기도 하죠. 여기서 무엇을 배웠나요?

링크트 바이 에어를 만든 타마라 말레틱(Tamara Maletic)과 댄 마이클슨(Dan Michaelson)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솜씨 좋은 동료들과 일하며 정말 많은 걸 배웠죠. 특히 좋았던 점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역할을 어색함 없이 유연하게 수행하는 분위기였어요. 저는 주로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프런트엔드 개발자나 프로젝트 매니저로도 일했죠. 예일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이 때문에 자바스크립트(JavaScript)를 배웠는데, 배울 때마다 재미있었어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만큼 좋은 배움은 없는 것 같아요. 이 점 또한 여기서 배웠죠.

2012년 링크트 에어 바이에서 작업한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를 위한 아이콘

저 또한 동감해요. TCI에서는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웹사이트를 처음부터 만들었어요. 창가에 놓인 화분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기분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TCI에서는 자유가 정말 많았어요. 놀라운 기회였죠. 예술가와의 대화를 평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창작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게 기본적인 콘셉트였어요. 모든 대화는 당장 열리는 행사와 연결되는 게 아니라 몇 년 뒤에도 유용할 수 있기에 ‘언제나 푸른’(evergreen) 콘텐츠로 불렀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인디펜던트’는 신문 제목에서 따왔지만, 저희는 TCI를 끊임없이 성장하는 자료, 즉 ‘창작을 위한 위키백과’로 여겼죠. 조사도 많이 했어요. 앞서 언급한 줄리아 카메론의 『예술가의 길』도 이때 읽었죠. 특히 오디오북 버전에서는 아름다운 플루트 선율이 흘러나와요. TCI를 세상에 내놓은 뒤에는 특별한 친구도 만났습니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이자 개발자인 엘리엇 코스트(Elliott Cost)가 TCI에 합류했거든요. 제가 고용한 그 덕에 제가 TCI를 떠난 뒤에도 제 생각이 이어질 수 있었고요.

그리고 뷰티풀 컴퍼니(Beautiful Company)를 운영하죠. 회사명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2013년 ‘뷰티풀 컴퍼니’라는 디자인 회사를 만들었어요. 제 경력의 초창기죠. 비록 구성원은 저뿐이지만 디자이너 특유의 방식으로 회사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하는 점이 즐거웠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뷰티풀 컴퍼니’에서 ‘컴퍼니’가 ‘회사’와 ‘친구’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도 즐거웠죠. 이 두 가지 목표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펼쳐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 웹을 매체 삼아 작가로도 활동하죠.

작가로서 저는 사물의 이름과 정의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에 관한 정의가 있어요. 제게 디자인은 프로젝트가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도록 입구와 출구를 만드는 일입니다. 여기서 ‘노래’는 누군가 프로젝트에 생생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일 수도 있죠. 출입구를 만들면 전체적인 시스템과 최적의 흐름이 만들어지곤 해요. 그렇게 시스템이 활성화하는 거죠.

사람들은 흔히 컴퓨터와 인터넷 같은 것만이 기술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글쓰기도 기술이죠. 우리 주변에 있는 전기도 기술이고요. 제가 기술에 관심이 많은 건 기술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한국에 있는 당신처럼 당장 내 곁에 없는 사람들과 저를 연결해주기 때문이에요. 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만날 수 없었겠죠.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은 모든 것을 날렵하고 빠르게 연결합니다. 잘만 활용하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법사가 된 기분이죠. 따라서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그 만한 책임감이 따를 수밖에 없고요.

당신 작업에서는 자연에서 비롯한 은유가 도드라집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자연이 오늘날 작업에 어떻게 반영되나요?

저는 기술을 이용한 작업에서 은유에 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TCI의 나선형과 달팽이처럼 자연에 기반한 은유가 많죠. 2021년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소개한 「연 만들기」에서는 ‘바람’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바람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주변과 환경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삶의 모든 힘에 관한 중요한 은유를 제공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은 현대적인 바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묘한 바람에도 쉽게 휩쓸리거나 하늘을 뚫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영향은 우리 주변에서 점점 더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스마트폰과 네트워크 기능을 갖춘 생활 사물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이 바람은 이따금 혼란스러울 만큼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연과 달리 인터넷이 탑재된 컴퓨터는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기술이기 때문에 더 많은 진화가 필요합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또 다른 디자인 철학은 ‘차분한 기술’입니다. 차분함을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든 디자인에 대한 근본적인 과제로 선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용자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고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물론 모든 기술이 차분할 필요는 없지만, 오늘날 너무 많은 디자인이 한 가지에 집중하면서 맥락, 환경, 나머지 주변을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소홀히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육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오랫동안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등에서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가르치기도 했죠.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선생으로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강조하나요? 나아가 학생들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얻기를 바라나요?

글쎄요. 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학생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유용하면 좋겠습니다. 웹사이트를 만들고 싶다면 코딩을 배울 수 있겠죠. 하지만 이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저는 예술가들이 코딩을 통해 살아 있는 시스템과 세계를 만드는 방식을 경험하고 이해하면서 코딩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만의 시스템과 세계를 만들기 위해 코딩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존 시스템이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저 스스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요. 이에 관한 이야기는 킥스타터와 크리에이티브 인디펜던트를 창업한 얀시 스트리클러(Yancey Strickler)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글쓰기와 세계 만들기」(Writing & Worlding)에 썼습니다.

저는 ‘자기 관리로서의 세계 만들기’에 관해 생각해왔습니다. 이 세상의 구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구조, 정의, 분류법을 만들어야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이름과 용기를 발명하는 데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가 단순히 존재할 수 있고, 우리가 공유하는 이 세상에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를 가르친 선생님은 과연 어떤 학생이었을지 궁금해지곤 해요. 당신은 제 친구인 동시에 선생님이기도 한데, 당신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저는 조용히 공부에 열중하는 학생이었어요. 가장 좋아한 과목은 과학과 미술이었고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숙제를 일찍 끝내면 숙제 뒷면에 말을 그리곤 했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많이 변했어요. 일단 학교에 반항심이 생긴 거죠. 음악과 공연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사귀고, 여름에 7주 동안 과학 캠프에 참석하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두 경험 모두 관심사와 열정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연결된 덕이었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 제가 인터넷을 통해 하는 일이기도 하죠.

친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2024년에 프루트풀 스쿨(Fruitful School)을 다시 열기로 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2020년 제 친구인 존 프로벤처(John Provencher)와 시작한 독립 워크숍인데, 여기서 많은 친구를 만들었어요. 워크숍을 통해 그들이 자신의 궤도를 바꾸고 전인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마주하는 것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없죠.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워크숍 이후 저와 존의 업무 방식이 달라진 터라 지금 상황에 맞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어요.

존 프로벤처(John Provencher)와 함께하는 프루트풀 스쿨(Fruitful School)

블로그나 뉴스레터처럼 글쓰기 또한 당신 작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디자이너라면, 아니 현대인이라면 글쓰기를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쓰기가 당신의 다른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글쓰기는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을 얻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저는 글쓰기가 강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손이나 키보드로 글을 쓰는 행위보다 뭔가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 대화 또한 글쓰기이자 강연인 셈이죠. 이 대화 이후에 제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져요.

이따금 강연에서 특정 프로젝트, 즉 새로움이 탄생하기도 해요. 예컨대 2018년 뉴욕의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 ‘피어 투 피어 웹’(Peer to Peer Web)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어요. 당시 저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비커 브라우저’(Beaker Browser)라는 P2P 기반 웹 브라우저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한 달 정도 강연을 준비하면서 저는 비커 브라우저 전용 블로그를 운영하고, 강연에서 그 결과를 공유했죠. 그렇게 강연에서 새로움이 만들어졌고요.

우리는 성공뿐 아니라 실패도 겪죠.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나요? 아니면 그대로 두거나 그냥 넘어가나요? 기억에 남는 실패가 있나요?

누구든 실패를 겪는 건 정상입니다. 팬데믹을 돌이켜보면 저는 실패를 거듭했어요. 제 작업과 삶 전체가 특별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수 없으니 정말 힘들었죠. 팬데믹 기간에 저는 이 말을 되새겼어요. “인내는 가장 정신적인 덕목이다.”(Patience is the most spiritual of virtues.) 어려움이 지나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필요해요. 실패에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죠. 인내를 도구 삼아 실패를 우아하게 처리하는 게 제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고요.

위 사진은 2023년 1월 29일 브루클린 보타닉 가든에서 열린 HTML 에너지(HTML Energy)의 프리라이팅에 참석한 네 명의 HTML 작가들이에요. HTML 에너지(HTML Energy)는 엘리엇 코스트(Elliott Cost)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죠.

현재 최신 버전 HTML에서 지원하는 태그는 총 113개입니다. 사실 모든 웹사이트는 여기서 탄생하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HTML 태그는 무엇인가요?

웹의 산소인 하이퍼링크를 만드는 <a> 태그를 좋아해요.

웹이 웹다울 수 있는 건 하이퍼링크 덕이니까요.

얼마 전 프로그래머 고든 브랜더(Gordon Brander)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최신 게시물에서 영감을 받아 1998년에 출간된 팀 버너스리(Tim Berners Lee)의 『거미줄 짜기』(Weaving the Web)를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아레나의 제 채널인 ‘인터넷의 역사’(A History of the Internet)PDF 파일도 있어요.

이 책에서는 “철학은 다음과 같다.”로 시작하는 다음 구절을 특히 좋아해요.

중요한 것은 연결에 있다. 중요한 것은 글자가 아니라 글자를 연결해 단어로 만드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아니라 단어를 연결해 문장이 되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문단이 아니라 문단을 연결해 하나의 글이 되는 방식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백과사전을 만들어 그 결과물(Tangle)에 질문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질문은 노드로서 같은 노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연결할 수 있다. 그 결과물에는 모든 답변이 있다.

가을의 킨들 © 2014 로럴 슐스트

흩어져 결국 사라지려는 생각을 글자로 연결하지 않으면 이 대화도 이뤄지지 않겠죠. 한편, 우리는 수많은 ‘처음’과 마주합니다. 이 대화 또한 당신뿐 아니라 제게도 ‘처음’이죠. 당신의 오늘은 어떤 ‘처음’으로 이뤄지나요? 내일은요?

낙관적인 어떤 사람들은 매일 아침이 새롭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는 그건 좀 과욕인 것 같아요. 저만 해도 매일 새로움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대신 저는 ‘계절’이나 ‘여행’이라는 개념을 좋아해요. 특히 계절은 하루보다 조금 더 길고 지구에 묶여 있죠. 저는 ‘계절마다’ 또는 ‘여행할 때마다’ 새롭다고 느껴요.

계절에 관해 조금 더 부연하면, 제가 발행하는 『돔에서의 또 다른 하루』(Another Day in the Dome)라는 뉴스레터가 첫 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발행하는데, 이번 가을에는 오랜만에 강의를 쉬는 터라 매주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게 꼭 강의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다음 계절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돔 투 돔’(Dome to Dome)이라는 새로운 코너를 시작하고 싶은데, 거기서 이 대화를 다시 소개하면 어떨까요? 『안팎』의 돔에서 저의 돔으로요.

로럴 슐스트의 뉴스레터 『돔에서의 또 다른 하루』

물론입니다. 중요한 건 무엇보다 ‘연결’이니까요. 미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한편, 저는 2022년부터 아레나 기프트 숍(Are.na Gift Shop)의 디렉터 겸 점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분기별로 아레나 주변의 친구들과 ‘선물 같은’ 상품을 만들죠. 그렇게 책을 시작으로 티셔츠, 씨앗 패킷, 카드를 만들었죠.

2023년 봄 아레나 기프트 숍에서 출시한 컴패니언 플랫폼(Companion Platform)의 씨앗 패킷
2023년 여름 아레나 기프트 숍에서 출시한 알렉스 싱(Alex Singh)의 「소박한 즐거움 카탈로그」(A Catalogue of Simple Pleasures)

평행 우주를 한번 상상해봅시다. 거기서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중요한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 또는 신생 항공사의 패기 넘치는 직원일 것 같아요.

이 대화에서 우리가 놓친 ‘처음’이 있을까요? 마지막 ‘처음’으로서요.

당신을 처음 만난 2016년 여름이 떠올라요. 뉴욕의 한 서점에서 만나 차이나타운에서 수박 주스를 함께 마셨죠. 제게는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기술, 디자인, 그리고 말이나 글로 정의할 수 없는 뭔가를 향한 공통된 관심사 덕 아닐까요? 이 대화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글쓰기는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을 얻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저는 글쓰기가 강연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손이나 키보드로 글을 쓰는 행위보다 뭔가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안팎』 8호
로럴 슐스트와 이야기하는 처음
https://anpakk.kr/conversations/8

  • 안: 민구홍
  • 팎: 로럴 슐스트
  • 번역: 민구홍
  • 글자색: lemonchiffon
  • 배경색: darkblue
  • 발행일: 2023년 11월 27일
  •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28일
  • 발행처: 안그라픽스